기획 완결 아름다운영웅김영옥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114>촛불 ⑷

입력 2011. 06. 2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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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레지옹도뇌르 훈장 수여>는 김영옥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한국은 영옥이 6·25전쟁에서 세웠던 불멸의 업적을 인정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에 앞선 2003년 한국은 그의 사회
봉사활동을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왼쪽), KBS도 해외동포상(사회봉사)을 수여했다(오른쪽).

전시에 또 평시에 그와 함께한 많은 사람이 영옥에게 무한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 같은 마음은 감미로운 미사여구로 들려오기도 했고, 소박한 일상용어로 들려오기도 했다.

 2차대전 때 그의 소대원으로 출발해 영옥 아래서 줄곧 함께 싸웠던 일본계 더글러스 일병은 군에서는 상병으로도 진급하지 못한 보통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인데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영옥에게 말했다.

 “내가 몸 성히 집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당신 덕분이오. 돌아와 결혼도 하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이제는 그들 모두 장성했지요. 그들은 당신 덕택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수년 전 영옥을 만난 재미동포 몇 명은 소액이 담긴 깨끗한 봉투 한 장을 건넸다. “감나무를 보면 어머니와 한국이 생각난다. 언젠가 집 뒤뜰에 감나무를 다시 심을 것”이라는 영옥의 말을 기억하고 뒤뜰에 감나무를 심으라는 의미였다.

 영옥이 감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감에 독특한 향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 캘리포니아 남부나 중부에 사는 영옥의 일본계 친구들이 매년 때가 되면 잊지 않고 한 상자나 두 상자씩 홍시나 곶감을 꼬박꼬박 챙겨 보내줬다.

 2005년 2월 프랑스는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있는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근사한 훈장 수여식을 가졌다. 영옥에게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주기 위해서였다. 필립 라리외 주LA 프랑스 총영사는 영옥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며 소리 높여 외쳤다.

 “프랑스는 김영옥을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십자무공훈장(2등 훈장)을 수여했다가 반세기도 더 지난 후 공적심사를 다시 해 자국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로써 영옥은 무공훈장으로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프랑스는 수여식을 앞두고 “세계 어디서든 원하는 곳에서 수여식을 할 수 있다”며 영옥이 훈장 수여식 장소를 선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영옥은 “당시 프랑스에서 함께 싸웠던 모든 전우의 이름으로 받을 것”이라며 수여식 장소로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기념비를 택해 수여식이 그곳에서 있었다.

 이날 수여식에는 한민족 최초로 올림픽 2연패(다이빙)의 위업을 달성한 스포츠맨이자 이비인후과 의사인 재미동포 새미 리 박사가 재미한인사회를 대표해 축사를 했다.

 “영옥이 없었다면 나의 올림픽 금메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영옥의 죽마고우이기도 한 새미는 다이빙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유색인이라 낮에는 수영장 출입을 못하고 코치의 허락 아래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풀장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아시아계라 올림픽 대표선수가 될 수 없었으나 영옥과 일본계 부대가 2차대전에서 보여준 희생과 활약 덕택에 아시아계라는 족쇄를 풀고 대표선수로 나설 수 있었고, 결국 올림픽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는 로마해방전 직후인 1944년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행정력을 회복하던 1946년 영옥의 공적을 재평가해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터였다.

 프랑스가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던 2005년, 그해 9월 마침내 한국도 움직였다.

 한국은 영옥이 6·25전쟁에서 세웠던 불멸의 업적을 인정해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주기로 했다. 6·25전쟁이 끝난 지 53년째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 그의 사회봉사활동을 인정해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이 무렵 한국 KBS 역시 해외동포상(사회봉사)을 수여했다.

 이로써 영옥은 2차대전과 6·25전쟁이라는 2개의 전쟁에서 한국·프랑스·이탈리아 3개국으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신화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한국의 태극무공훈장 서훈 소식은 그가 6·25전쟁 때 수백 명의 전쟁고아까지 돌봤으며 전역 후에도 사회봉사활동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인도주의자라는 얘기와 함께 10월 21일 AP통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로마해방전에서의 활약상이 당시 UPI통신을 타고 전 세계로 알려진 지 62년 만이다.

 한국의 태극무공훈장 서훈이 확정되던 날은 영옥이 3차 암 수술을 받은 바로 다음날로 아직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며칠 후 서훈 소식을 들은 영옥은 수술에서 회복되지 못해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할 기회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한국 대통령에게 감사편지를 썼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강조하던 영옥으로서는 한국인 모두에게 보내는 감사편지였다.

 “…(전략)…

 이번에 저에게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심을 무한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훈장은 당시 한국의 최전선에서 함께 피 흘려 싸웠던 모든 한국군 및 미군 장병의 이름으로, 특히 당시 한국을 지키기 위해 귀한 생명을 바친 전몰장병들을 생각하며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 와 조선의 독립만을 염원하며 살았던 부모 덕분에 평생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으며, 군인으로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도 한국에 전쟁이 났을 때 재입대를 자원해 부모의 나라를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번에 주시는 훈장은 다른 여러 나라의 훈장들과 달리 제게는 실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훈장은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동참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모든 해외 한민족에게 조국이 주는 치하와 격려의 상징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한국에 도착할 때 어둠에 묻혀 다가오는 부산항의 모습을 비롯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의 참상은 아직도 잊을 수 없으나, 군사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갔을 때는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봤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눈부신 경제 및 정치 발전을 거듭하고 있음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중략)…

 고령으로 제가 다시 한국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조국이 베풀어 준 모든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며 한국의 평화통일과 대통령 각하의 건승을 마음속으로부터 기원합니다.”

 태극무공훈장은 그해 말 영옥이 세상을 떠나고 2006년 2월 3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 있는 미국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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