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고대동아시아세계대전

<14> 성골여왕의 탄생

입력 2011. 04. 1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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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신라 구해 낸 왕의 딸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관은 신라 왕족들의 신성함을 보여주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다. 사진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으로 신라 금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손꼽힌다.         자료사진

 덕만(德蔓)의 결혼생활이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대규모 전쟁을 예고라도 하듯 607년 핼리혜성이 지구에 나타났다. ‘수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607년) 2월을 전후해 100일 동안 하늘에 혜성이 떠 있었다.”

 하늘의 반을 덮은 혜성의 꼬리를 보고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앞으로 닥쳐올 재앙에 대한 불안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왕은 백성의 불안감을 해소할 의무가 있다. 진평왕은 이 불길한 천체를 제거하기 위해 성대한 의식을 주관해야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의례라는 행사를 거행할 필요가 없다.

 의례의 장면은 이러했으리라. 먼저 제단을 설치했고, 왕은 융천 스님에게 혜성을 물리칠 수 있는 혜성가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동안 왕실 수공업 공장의 일류 장인들이 만든 의례용 제기와 제사 제물 그리고 다른 제기들이 질서정연하게 제단에 올랐다. 의례의 장소에는 왕실 구성원들과 관리들, 군인들이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의례는 감동과 다채로움을 선사해야 한다. 의례를 주재하는 승려들은 화려하게 차려입었으며, 의례의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기 위한 무희들과 솜씨 좋은 악공들이 동원됐다. 의례를 보기 위해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융천 스님이 지은 혜성가가 선창되자 백성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반복됐고, 도취된 백성들은 집단최면에 걸려들었다. 혜성가가 왕경에 울려 퍼졌다.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융천 스님의 ‘혜성가’는 이 시기의 산물이다.

 혜성이 예언했듯이 수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고구려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라를 공격했다. 608년 2월에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방을 공격해 8000명을 사로잡았으며, 4월에는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이 확실해진 611년에 진평왕은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표를 올렸다. 이는 수가 요동 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여기에 호응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발목을 잡았다. 그해 백제는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해 100일 동안 포위했으며, 이를 함락시켰다.

 한편 611년 4월에 수나라의 100만 정벌군이 지금의 북경에 집결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612년 압록강을 건너간 수나라군 30만이 전멸했다. 세계 최강이라 믿었던 수군이 전멸한 사건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전 세계가 놀랐다.

 613년 가을 7월 황룡사에서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 당시 수나라는 내란에 휩싸였고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백좌법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왕경에 퍼졌고, 곧 전국의 고승들이 왕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백좌법회란 많은 승려를 모아놓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불경을 읽는 법회다. 이는 반드시 국왕이 시주가 돼 국가의 안태를 기원한다.

 장례식이란 의례도 없이 부모를 매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결혼식이란 의례 없이 부부가 되는 것을 꺼려하듯이, 의례는 모든 인간에게 본연의 감정표현이며 의례는 인간 안에서 유래된 것이다. 특히 국가의례는 국가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의례로 일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사회적 차별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이유가 가족의 제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국가의례를 지속하기 위해 왕가는 존재하는 것이다.

 632년 1월 하늘같이 믿었던 아버지 진평왕이 돌아갔다. 진평왕도 정비 소생의 아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요람에서 죽었을 수도 있으며, 덕만도 백반갈문왕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었지만 근친혼의 열성인자가 누적돼 떨어진 과실이 됐을 수도 있다. 남편도 일찍 죽었다. 진평왕의 동생인 그는 여자인 만덕보다 왕위계승 순위가 높았다. 만일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진평왕을 이어 즉위했을 것이다. 덕만이 즉위할 당시 성골(聖骨) 남자가 없었던 것은 지속적인 근친혼의 결과였다.

 최근 근친혼의 대명사인 스페인 합스부르그 왕가에 대한 콤포스텔라(Compostela) 대학 알바레즈(Alvarez) 연구팀의 의학적 연구가 나왔다. 합스부르그 왕가는 유럽의 최고 명문이었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6세기 동안 다스렸고, 결혼에 의해 보헤미아·헝가리·스페인을 통치했다.

 이 가문은 권력세습을 유지하기 위해 빈번한 근친혼을 하게 됐다. 200년간 스페인을 다스리면서 11건의 결혼을 했는데 9건이 근친혼이었다. 찰스 2세는 삼촌과 조카딸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필립 4세와 오스트리아 왕실의 조카인 마리아나의 결혼이 그것이다. 필립 4세의 조부인 필립 3세 역시 아버지 필립 2세와 조카딸 안나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합스부르그 왕가의 아이들은 유아기와 소년기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유아의 40%가 한 살을 넘기지 못했고, 어린애의 절반이 10살 이상을 살지 못했다. 당시 스페인 평민 유아의 생존율은 80%를 넘었다고 한다. 특히 합스부르그 왕가의 찰스 2세의 지병은 명백한 근친혼의 결과였다.

 동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허약했으며 장 질환과 혈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4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했고 8살이 되도록 걷지도 못했다. 그의 허약함은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근친혼의 가장 큰 특징은 대를 거듭할수록 열성인자만 누적된다는 점이다.

 찰스 2세의 발기부전 무정자증의 원인으로 두 가지 유전적 결함, 뇌하수체 호르몬 결핍증과 신세뇨관 산증, 신장기능 부전으로 산기가 오줌으로 배출되지 못하는 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자식도 없이 38세로 사망했다.

 덕만의 왕실가족 가운데 남자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아버지 진평왕의 삼촌이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살아 있었다. 5촌 당숙인 그는 덕만의 여동생인 천명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춘추를 두고 있었다.

 왕위계승결정권을 가진 종친(진골귀족)들도 난감했다. 여자를 왕으로 세운 전례가 없었다. 더구나 전쟁이 지속되는 난국이 아닌가. 자신들이 폐위했던 진지왕의 아들 용춘을 왕위에 올리자니 뭔가 걸렸다. 세월이 53년 지났지만 그래도 폐륜아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고, 인고의 세월을 살았던 그 한 많은 사람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왕족들 가운데 진평왕의 직계존속, 혈통이 신성했다. 국가의례의 제사장은 국왕이며, 왕실이란 그 제사장을 배출하는 가문이다. 그 가문 내부에서도 왕이 배출되는 가족은 신성하다.

 신라 사람들은 진평왕을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해 낸 영웅으로 보았다. 진평왕은 반세기 이상 왕위에 있었고, 생의 마지막까지 고구려ㆍ백제와 혈투를 벌였다. 그동안 국가 생존은 지상의 과제였으며, 진골 귀족들도 국가 보위 전쟁에 말없이 그들의 병력과 물자를 내놓아야 했다. 사람들이 진평왕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왕에 대한 믿음 속에서 다른 왕족들과 진평왕 직계 가계를 달리 보는 의식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평왕 가족을 일반 진골 귀족보다 더 상위에 놓고 보는 성골 의식이 그것이다. 성골의식은 아래에서 시작됐다. 덕만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이웃나라 왜국(倭國)에 여왕 스이코(推古)의 존재는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했다.

 진골귀족들은 덕만(선덕여왕)을 성골로 받들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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