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되돌아보는북한의도발

<5> 미군에 대한 도발

신인호

입력 2011. 01. 06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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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만행 사건<1976년 8월 18일>'… 도발의 정점


1969년 격추된 미군 EC-121기와 동종의 항공기.
평양 대동강에 전시, 선전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푸에블로 함.
   80년대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지만, 북한은 미군에 대해서도 심각한 도발을 일으켰다.

기록을 살펴보면 67년 5월 22일 북한이 서부전선의 미군 막사를 폭파해 2명이 사망하고 19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눈에 띈다. 이어 8월 7일에는 판문점 남쪽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야간매복하고 있다가 미군을 습격했는데 미군 3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이렇듯 북한이 미군에 저지른 도발은 대부분 67~70년 사이에 자행됐다. 76년 8월 18일 일으킨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정점이 되는데, 이 도끼만행사건과 함께 68년의 미 해군 ‘푸에블로 함’ 납치사건, 69년의 정찰기 격추사건이 3대 충격적인 도발로 꼽힌다.  

  ▶ 푸에블로 함 납치사건

 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동경 127도 54분, 북위 39도 25분 북한 원산항 앞 공해(公海)상.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 함의 함장인 로이드 부커 중령은 갑자기 나타난 북한 초계정의 위협에 깜짝 놀랐다. 북한 미그기 두 대가 공중에서 위협 비행을 하고, 곧이어 초계정과 구잠함(驅潛艦)이 몰려들었다. 함장은 방향을 돌리려 했지만 함포 사격을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포격으로 1명이 사망했다.

 경화물선을 개조한 함정으로 중량 906톤,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2노트의 푸에블로 함은 이렇듯 순식간에 나포(拿捕)됐다. 미 해군 역사상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된 초유의 일이어서 충격도 컸지만 무엇보다 1·21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이 있은 지 불과 이틀 후에 벌어진 북한의 이 도발에 세계가 경악했다. 더욱이 사건 이틀 후인 1월 25일, 북한군은 무장 공비로 하여금 미군부대 전방 초소를 기습하게 했다. 미군 초소 근무장병 5명이 응전하는 가운데 2명이 전사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를 동해로 급파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고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쟁 중인 탓에 강경책을 구사하기 곤란했다. 결국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68년 12월 23일 28차례에 걸친 비밀 협상 끝에 푸에블로 함 선체와 장비는 북한 측에 몰수되고,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것으로 마감됐다.

 함은 현재 평양 대동강 기슭 ‘충성의 다리’ 근처에 선전용으로 전시돼 있다.

 ▶ EC-121 격추 사건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사태 후 북한의 도발은 잠잠해졌고 해를 넘겼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69년 봄이 되자 도발을 재개했다.

첫 사건은 미군부대 피격이었다. 3월 15일 미군 병력이 GP 앞의 군사분계선 작업을 위해 진입하던 중 무장 공비의 총격을 받았다. 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부상 장병들은 이틀 후 헬기로 후송되다 헬기가 추락, 승무원 등과 함께 사망했다.

 이 사건 한 달 뒤인 4월 15일, 오후 2시쯤 미 해군 항공기 1대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미 해군 소속의 EC-121 워닝스타(warning star) 정찰기가 일본 아쯔키 해군기지에서 이륙한 지 7시간 만에 연락이 끊긴 것이다. 북한 공군의 미그 21 전투기가 발사한 공대공 유도탄 AA-2 아톨에 의해 격추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격 지점은 북한 청진에서 남동쪽으로 152㎞가량 떨어진 공해상이었고, 34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행정부는 이때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발발 가능성을 우려해 정찰기 격추사건에 대한 보복공격은 유보하되, 장차 이 사건과 유사한 도발이 재발할 경우, 북한에 대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는 내용의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검토했던 것으로 훗날 공개된 기밀문서에서 밝혀졌다.

 한편, EC-121기가 격추된 지 한 달이 지난 5월 15일, 전방을 점검 중이던 미군 병력이 무장 공비의 사격을 받았다. 공비들은 응사하자 도주했지만, 미군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어 5일이 지난 20일, 미군이 근무 중 침투하는 공비 3명을 발견, 일제 사격을 가했다. 수색 결과 1구의 공비 시체를 발견했다. 또 70년 6월 15일에는 장단반도 거곡리 제1초소에 근무 중이던 미군을 기습 공격, 교전을 벌였다. 미군은 공비 1명을 사살했다.

 ▶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아침부터 더위가 시작된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삽시간에 잔혹한 참극의 현장이 된다. 이날 오전 3명의 유엔군 측 장교와 경비병들이 5명의 한국노무단(KSC) 소속 근로자들을 데리고 유엔군 측 제3경비초소 근처로 갔다. 이곳의 미루나무 가지를 치기 위해서였다. 높이가 15m되고 무성한 미루나무 잎은 전방 관측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북한 인민군 30여 명이 다가와 “중단하라”며 시비를 걸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니 갑자기 “죽여라”는 북한군 장교의 고함 소리와 함께 도끼와 곡괭이를 휘두르며 유엔군을 기습했다.

  이날의 ‘도끼만행 사건’으로 유엔군 소속 미군인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버렛 중위가 사망했다. 도끼와 몽둥이, 삽 등으로 온몸을 얻어맞아 무참하게 숨졌다. 또 카투사 5명과 미군 병사 4명 등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유엔군 소속 차량 3대도 파손됐다. 전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오산기지에서는 폭격기와 전투기가 발진 대기 중이었다. 항공모함 미드웨이가 한반도로 향했다.

 우리 군은 사건 3일 뒤인 21일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내는 폴버니언작전을 전개하는 등 북한에 대해 결연한 자세로 대응해 나갔다. 마침내 북한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북한군에 의해 자행된 이 사건에 유감의 사과 서한을 보내왔다. 그동안 북한의 수많은 정전협정 위반 및 도발행위 중 처음이자 마지막 사과였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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