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되돌아보는북한의도발

<2>비무장지대 도발

신인호

입력 2010. 12. 2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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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평화 공세 펴며 남침용 땅굴 파내려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됐지만 이후 북한이 파내려온 남침용 땅굴이 잇따라 발견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해 북한이 오히려 남침 준비에 몰두했음이 드러났다. 사진은 지난 75년 강원 철원지역에서 발견된
제2땅굴(위 사진)과 90년 강원 양구지역에서 발견된 제4땅굴(아래 사진)의 내부 모습. 이들은 규모가 커 단순한 간첩침투
용이 아니라 전쟁 시 대규모 병력 투입용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방DB]



 6·25전쟁이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휴전 상태에 들어간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을 향해 빈번하게 무력도발을 자행한 곳은 역시 155마일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를 통해서다. MDL을 월선하고 돌아가는 사례로부터 기관총 사격은 물론 전면 남침을 위한 땅굴 굴설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도발 양상은 다양했고 위협적이었다.

 전후 복구기에 해당되는 1950년대에는 도발의 기록이 많지는 않다. 53년 11월 16일 북한 위관급 장교 한 명이 자동권총을 지닌 채 당시 유엔사령부 소속 인도군(軍)이 맡고 있던 포로관리부대에 침투하다 체포된 것이 최초의 도발이며, 54년 7월 7일에 한강 하구 DMZ에서 접경 지역을 순찰하던 아군을 향해 처음으로 총격을 가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한의 도발은 소위 4대 군사노선(전 군의 간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 지역의 요새화, 장비의 현대화)을 채택한 후인 6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됐다.

 지금과 같은 철책은 꿈도 못 꿨던 시기, 61년 4월 22일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의 도발로 유엔군과 북한군 간에 주먹다짐이 10분 동안 계속됐고, 넉 달 후인 8월 25일 MDL을 넘어 온 북한군 전투정찰대가 우리 군 초소를 습격해 1명 사망, 4명 중경상이라는 피해를 입히고 도주했다. 이어 62년 7월 14일에는 중부전선에서 우자원 중위 등 4명이 북한군에 피랍됐다.

 이즈음인 64년부터 GOP선상에 지금의 철책의 원조격인 목책(木柵)을 설치하기 시작했지만 도발은 끊이질 않았다. 67년 육군21사단에서는 적이 침투, 현직 부연대장(홍두표 중령)의 목을 베어 간 사고가 발생하는 등 하루 저녁에만 1개 사단 지역 4개소에 공비가 동시다발적으로 침투할 정도였다.

 67년 4월 12일에는 북한군 60~90명이 휴전선을 침범해 아군 1명이 전사했다. 이때 육군7사단 예하 3개 포병대대가 고폭탄(HE)과 조명탄을 발사해 ‘휴전 후 최초의 포병사격’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공비사건 등으로 북한의 도발 수위가 점점 높아진 후 73년 3월 7일 DMZ 내 표지판을 보수작업한 후 귀대하던 육군3사단 장병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사단은 MDL 바로 북쪽으로 불법 설치된 북한 559GP(감시초소)와 불법사격을 가했던 적 보병 배치선에 포병 사격하는 대응작전을 전개했다.

 72년은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등 평화무드가 조성되기도 했으나 이 시기에 북한은 오히려 남침 준비에 몰입했음을 보여주는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왔다. 김일성이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라고 한 땅굴은 74년 11월 15일 임진강 고랑포 지역 DMZ 남단에서 발견됐다. MDL 남쪽 1200m까지 형성된 이 땅굴은 1시간에 1개 연대 병력과 각종 군수물자를 침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후에 철원·판문점·양구에서 추가로 발견된 제2·3·4호 땅굴은 그 규모가 고랑포의 제1땅굴보다 더 커 그것이 다만 간첩침투용이 아니라 전쟁 시 대규모 병력 투입을 목표로 한 것임이 명백해졌다.

 76년 판문점에서는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전쟁 발발 위기로 몰아갔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만행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군은 판문점 내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버니언 작전을 전개, 강경한 대응을 폈다.

 80년대에도 DMZ를 통한 도발은 계속됐다. 주로 무장간첩 침투가 목적이었다. 80년 3월 경기 고양 법곶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는 공비 1명을, 81년에는 임진강 필승교 인근에서 공비 1명을, 83년 6월 19일에는 임진강 임월교에서 공비 3명을 발견하고 사살했다. 92년 5월에는 중부전선 DMZ로 침투하는 공비 3명이 아군 GP 남쪽으로 침투하다 전원 사살됐으며, 95년 10월에도 임진강변 GOP 절벽으로 오르는 공비 1명이 아군 초병에 의해 사살됐다. 97년 10월 17일에는 무장한 북한군 12명이 대성동에서 주민 2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북한이 DMZ를 통해 무장간첩을 남파해 발각된 사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MDL을 월선했다가 돌아가거나 아군 GP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는 등의 도발은 지속되고 있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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