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보는6·25

<97>이승만 대통령의 군 수뇌부 인사

입력 2008. 12. 2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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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대통령의 군 인사정책에는 일관성과 원칙이 있었다. 이 대통령 재임 12년 동안 국방장관 7명과 국방차관 8명이 교체됐다. 또한 이 대통령은 합참의장 4명, 육군총장 8명, 해군총장 4명, 공군총장 4명, 해병대사령관 3명을 임명했다. 그 가운데 6·25전쟁 3년 동안 국방장관은 신성모·이기붕·신태영·손원일이고, 육군총장은 채병덕·정일권·이종찬·백선엽이다.

    해군총장은 손원일·박옥규, 공군총장은 김정렬·최용덕, 해병대사령관은 신현준이다. 합참(당시 연합참모본부)은 전쟁시 편제에 없었으나, 전후 국가의 군사정책을 건의하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발족됐고 이에 따라 합참의장 직책이 신설됐다.국방장관은 전쟁 초기에는 민간 출신인 신성모와 이기붕을 기용해 전쟁을 수행했으나, 전쟁 중반부터는 군 출신으로 육군총장을 지낸 신태영 장군과 해군총장을 지낸 손원일 제독을 중용했다.

    이 대통령의 국방장관 인사 스타일은 하나의 원칙과 사이클에 따라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국방장관 임면(任免) 사이클은 군 출신에서 민간 출신, 다시 군 출신에서 민간 출신으로 이뤄졌다. 즉, 최초 군 출신 이범석에서 민간 출신 신성모, 이후 군 출신 신태영·손원일에서 민간 출신 김용우, 그리고 다시 군 출신 김정렬로 교체됐다. 특히 군 출신 장관 중 육·해·공군총장 출신이 모두 한 번씩 국방장관에 기용됐다.

    그것도 육군(신태영)·해군(손원일)·공군(김정렬)의 순서에 따라 이뤄졌다. 이 대통령의 이런 인사원칙의 배경에는 각군의 균형적 발전을 고려한 통수권 차원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혜안에서 나온 조치였다.이는 전쟁 이전 한국 정부의 요청에도 미국이 전투무기와 장비를 지원하지 않자 이 대통령이 국민모금운동을 전개, 전쟁 직전 해군 구축함과 항공기를 구입한 것을 볼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조, 능력과 충성도를 고려해 장관을 임명했다. 전쟁 초기 전시내각과 국가원로들이 이범석을 국방장관에 임명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 대통령은 미국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잘 유지하며 미국이 선호하는 신성모 장관을 그대로 유임시켰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특히 이 대통령은 손원일 제독의 능력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고려해 현역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곧장 국방장관에 임명, 휴전 이후 산적한 국방 현안을 해결케 했다.
    국방차관도 대체로 군 출신과 민간 출신을 비교적 균등하게 배려하는 등 인사 운용의 묘(妙)를 살렸다. 국방장관과 차관의 출신을 고려해 민간 출신 장관일 경우에는 군 출신 차관을, 그리고 해·공군 출신 장관일 경우에는 육군 출신 차관을 임명해 업무의 효율성과 자칫 발생할 수 있는 국방상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각군 총장의 인사에도 특징적인 요소가 발견된다. 육군총장은 평균 1년에 한 번씩 교체했다. 이는 전후방 각지에서 매일 벌어지고 각종 전투와 이에 따른 보급·병력보충 등 실질적으로 전쟁을 이끌고 지도하는 육군총수로서의 격무, 각군을 대표하는 선임총장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전시 계엄업무 등 부가적인 전쟁업무 수행에 많은 정신적·육체적 노력이 수반되는 고된 직책임을 고려해서다.

    그럼에도 백선엽·정일권은 그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총장을 두 번씩 지냈다. 반면 해군총장은 손원일이 전쟁 3년간을 지냈고, 나머지 1개월은 박옥규가 수행해 해군 발전에 기여했다. 공군총장은 김정렬과 최용덕이 총장직을 수행했다. 특히 김정렬은 공군 역사에서 유일하게 총장을 두 번 지냈고 이후 국방장관을 지낸 공군의 대부(代父)다. 해병대사령관은 신현준이 그 직책을 수행, 해병대 발전에 기여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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