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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끝>사담 후세인의 최후

입력 2008. 01. 2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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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3월 20일 오전 6시 15분, 미국 주도하에 이라크 내 주요 전략목표에 대한 정밀타격을 개시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9·11테러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아프가니스탄을 응징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이라크·이란을 지구촌의 평화를 깨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테러전쟁의 축차적 확대를 예고했다.

    이라크는 걸프전쟁 이후 대량살상무기(WMD)의 완전 폐기와 함께 개발을 전면 금지당했다. 그러나 1998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유엔 무기사찰단의 특정지역 사찰을 거부함으로써 사찰단이 전면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국·영국은 이를 빌미로 99년 12월 ‘사막의 여우 작전’을 펼쳐 바그다드와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비축 의혹 시설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무기사찰단을 대체한 유엔사찰위원회 활동마저 받아들이지 않아 미국과의 갈등을 증폭해 왔다. 이처럼 9년여에 걸쳐 계속 돼온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상황이 9·11테러를 계기로 폭발해 버렸다.미국을 위시한 영국·호주 연합군은 이라크 전역의 주요 전략목표에 대한 정밀폭격과 함께 지상군을 진입시켜 단시간 내에 남부 전략 요충지 바스라를 장악하고 곧바로 수도 바그다드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전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미군과 연합군은 불과 개전 20일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후세인 정권을 축출해 버렸다. 중동의 풍운아, 이슬람의 영웅, 그리고 포악한 살인마이자 희대의 독재자 후세인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후세인은 37년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바그다드 법대 재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20세에 범아랍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에 입당한 후세인은 59년 카셈 대통령 암살기도사건에 연류, 4년간의 해외 도피와 2년간의 수감생활을 치르기도 했다. 출감 후 다시 바트당의 첩보원 등 핵심 임무를 수행했고, 68년 바트당의 정권 탈취 쿠데타를 주도해 이를 성공시킴으로써 일약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돼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79년 대통령에 오른 후세인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혁명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이란을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사실 후세인이 권좌에 오른 것도, 그리고 이라크가 중동의 강국으로 부상한 것도 모두 미국과 무관치 않다. 미국은 공산주의 소련의 견제와 팔레비를 대신한 친미적 포스트 중동 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그와 이라크 부흥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과 함께 중동의 강자로 부상한 후세인은 아랍의 자주를 내세우면서 반미노선으로 전환, 미국 석유회사를 추방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생산 비축하는가 하면,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미국과 극단적 적대 관계를 조성해 왔다.바그다드 함락과 함께 은신해 버렸던 후세인은 결국 2003년 12월 14일 저녁 8시, 고향 티크리트의 아두아 마을 한 농가에 구축된 참호에서 체포돼 바그다드로 압송됐다.

    그리고 82년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구실로 두자일 마을 시아파 주민 148명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결국 1심 재판에 이어 항소심인 최고항소법원에서도 사형 판결을 받아 2006년 12월 30일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다.그는 반인권적 독재자인가, 중동의 영웅인가, 그의 처형은 정의의 심판인가 아니면 보복인가, 사담 후세인은 엇갈린 평가를 남긴 채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김영이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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