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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전사여행<15>충주 ‘탄금대’

입력 2007. 12. 0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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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북도 충주는 오늘날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볼 때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하다. 1592년 발발한 최대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조 25년 4월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부산 동래를 거쳐 서울로 북상해 오자 신립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지역을 지키게 됐다.

    신립은 유성룡이 모집한 군관 80여 명과 함께 훈련 한번 받아 보지 못한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모집해 가며 4월 26일 충주에 도착,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진을 쳤다. 그가 끌어 모은 군사는 겨우 8000여 명이었고 그것도 화살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한편, 4월 25일 상주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일 장군은 적의 급습을 받아 문경으로 후퇴하고 조령을 지키기 위해 이동 중 신립이 충주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조령의 변길과 함께 충주로 내달았다. 신립은 이들을 선봉으로 삼고 단월역에 진을 치고 작전을 세우게 됐다. 이때 적군은 26일 아침에 상주를 출발해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했다.

    문경에서 항복하지 않은 현감 신길원을 죽이고 하룻밤을 묵은 후 27일 문경을 출발해 조령을 넘어 28일 아침 수안보를 지나 정오쯤에는 충주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아군의 상황을 정찰케 했다. 신립도 27일 적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날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고 다음날인 28일 아침 일찍이 신립은 군사 8000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좌익대장 아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대장 고니시의 7000병력을 합해 1만5000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했다. 아리바·오오무라·고지마 등이 거느리는 3700여 명의 예비대 적병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대로 달천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 삼면으로 포위 공격해 왔다.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은 제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1000기의 군사가 일제히 창과 칼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무찔렀다. 적은 보병이라 말에 밟혀 죽고 창에 찔려 죽는 자가 허다하고 함성과 비명이 메아리치고 아군과 적군은 하나가 돼 뒤엉켜 싸웠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제2차로 1000명을 적진에 돌격시켜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했고 좌우에서 몰려오는 적세가 강대해졌다.
    신립은 제3차로 2000명의 기병을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 소리, 조총 소리, 인마의 고함이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다. 신립의 앞을 막는 자는 없었으나 개떼 같이 달려드는 적병을 어쩔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하는 말이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며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 돌격대의 진두에 나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승리할 수는 없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將)이라 했다. 1981년 10월에 충주시 칠금동 산 1-1 번지 탄금공원에 시민들의 뜻을 모아 그의 순절비를 열두대 옆에 세웠다. 충주시내 서북쪽에 위치한 탄금대는 오늘날 충주댐의 보조댐으로 탄금호가 조성된 탓에 주변 경치가 뛰어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육군2작전사령부 정훈공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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