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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경기도 오산 유엔군 초전기념비

입력 2007. 03. 2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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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24일 경기 오산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비(사진)를 찾았다. 당시 이 고갯마루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구석구석 찍은 후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낯선 이방인 4명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미군이었다. 두 명은 젊은 남녀 군인, 나머지 두 명은 나이와 계급이 느껴지는 군인이었다.

    필자는 그들을 본 것만으로 넘기는 것이 아쉬워 필자의 신분과 전적지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고 전적비 앞에서 포즈를 취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들은 선뜻 응했다. 그리고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 역시 군인이 아니더라도 만약 베트남에 가서 우연히 한국군 베트남 참전비를 보았다면 평소와 다른 감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들을 보내고 나니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들에게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선배들의 격전지를 직접 본 느낌이 어떠한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허심탄회하게 묻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50년 전 수많은 젊은이가 이역만리 우리를 위해 희생했던 점에 대해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유엔군 초전기념비는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최초로 참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전투가 한국전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처럼 이곳에 세워진 전적비·동상 모두 예술적으로 매우 뛰어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수원·오산을 잇는 죽미령에 세워진 이 전적비의 동상 속 병사들은 수원에서 오산방면으로 밀려오던 북한군을 막았던 당시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우방국들에게 파병을 권고했다. 이에 일본에 있던 미24사단 제1대대(대대장 제임스 B 스미스 중령)의 B, C중대와 같은 사단의 제52포병대대 A포대 장병 총 540명이 한국에 급파됐다. 일명 스미스특수임무부대로 불리는 이 부대는 부산을 거쳐 개전 후 급속도로 남하하고 있던 북한군을 막기 위해 이곳 죽미령에 배치됐고, 마침내 1950년 7월 5일 전차 33대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 5연대를 맞아 최초의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과 유엔군의 첫 전투였다. 약 6시간의 전투 끝에 북한군은 127명, 미군은 180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미군은 큰 손실과 충격을 받았다. 미군은 전선에 참가하기만 하면 북한군이 겁을 먹고 도망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투 능력은 예상 외였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미군은 북한군의 전차가 거대한 전함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미군은 비로소 북한군의 전투 능력을 확인하게 됐다. 북한도 미군의 참전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 미군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설사 파병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2개월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계산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5000평 대지 위에 19.5m 높이의 전적비, 3.6m 높이의 동상으로 구성된 이 전적비는 82년 국방부에 의해 경기 오산시 내미삼동 죽미령에 건립됐다. 탑신 3개는 최초 3개의 진지를 구축한 것을, 동상은 격렬한 전투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서동일연구관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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