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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513>-에필로그

입력 2006. 12.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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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독 간호원 교육 일을 주관한 덕분에 고향 처녀들을 많이 보내 줬다. 취직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던 시대에 자격증 따서 독일에 보내 취직까지 시켜 줬다고 좋아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독일에 간 아내가 다달이 부쳐오는 돈으로 자식 가르치고 집까지 사는 친척을 보고 흐뭇했던 기억도 있다. 어떤 친척은 딸이 보내 온 초청장과 비행기 표로 독일에 갔다 왔다면서 “딸을 보내 준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손을 꼭 잡아 줬다.
    파독 간호원과 광부, 그리고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 봉급과 수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재원의 일부가 됐다는 것을 알고 나라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느껴 봤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4년 독일을 방문, 사통팔달의 고속도로망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숙원사업으로 꼽았던 일이라고 들었다.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고 부실공사 시비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됐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에 미쳐 있었던 나는 엉뚱한 일을 저질러 캐나다 유학을 가게 됐다. 1군사령부 초창기부터 인연을 맺었던 백선엽 장군이 주 캐나다 대사로 재임하던 때였다. 우연히 유학을 가고싶다는 의사를 비치게 됐는데 백대사님이 적극 주선해 주셨다. 캐나다에서는 처음에 공부를 하다가 간호사 자격증을 따 취직해 3년간 다녔다.
    월급도 많고 선진국 생활도 신기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향수병을 견디지 못 하고 귀국했다. 공화당 부녀조직 일을 거들기도 했고, 그 덕분에 대한부인회 고황경 회장을 보좌해 부인운동을 돕기도 했다. 재향군인회 부녀부장 일도 한 1년쯤 했다. 그러다가 또 바람이 났다.
    이번에는 미국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유학을 간 막내동생 뒷바라지를 해준답시고 갔다가 고향 친구를 만난 게 인연이 돼 주저앉고 말았다. 주미 대사관 무관 부인인 친구는 만리 타국에서 혼자 외롭게 살다가 나를 만나자 같이 지내자면서 붙잡고 늘어졌다. 친구 도움으로 영주권을 얻어 한동안 재미를 붙이고 살았으나 얼마 못 가서 어머니 때문에 돌아오게 됐다.
    나이 들어 일거리가 없어진 뒤로는 곁이 허전해서 외로웠다. 옛날 친구들 만나 남편자랑 자식자랑을 들을 때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리 될 줄 알았어.”
    영국의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이다. 스스로 우유부단하다고 자탄했던 그는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성미를 후회, 이런 묘비명을 남겼다. 나는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내 성격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 좋다는 사람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응대하지 못해 결국 평생을 혼자 살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성격이 결코 무익하지만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너무 집착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동기생 32명 가운데 나 혼자만 이렇게 정신과 육신이 멀쩡하게 남아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미리 그렇게 운명지어졌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 간호장교 역사는 너무 생략되고 건너뛴 데가 많다. 내 이야기가 ‘살아있는 간호장교사’를 편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영광이겠다. 오래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원고 정리에 수고해 준 작가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정리=문창재(언론인)
    인기리에 연재되던 ‘군복입은 하얀천사들’이 58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새해부터 베트남 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의 ‘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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