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우표로엮는軍

<68>휘르트겐 숲 전투

입력 2006. 12. 1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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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늦여름, 영미 연합군은 노르망디 교두보를 돌파해 북프랑스를 횡단, 독일 국경에 바짝 다가섰다. 급격한 진격에 늘어난 보급선을 감당하지 못한 연합군은 9월 초에 정지했고, 라인 강으로의 추가 진격을 위해 전력 재정비에 나섰다.
    이어 전선 중앙을 담당한 미국 9군은 독일 국경지대의 첫 주요 도시인 아헨 포위 공략에 나섰다. 곧 우익의 미국 1군은 아헨 지구로의 독일군 증원을 차단하고자 휘르트겐 숲을 가로질러 슈미트와 뫼즈 강의 지류인 루어 강으로 진출하는 조공을 기획했다.
    미군은 9월 19일, 9보병사단의 60보병연대를 선견대로 휘르트겐 숲으로 진입시켰으나 이내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퇴각했다. 140㎢의 작전지역에 60% 이상 걸쳐 있는 이 숲은 대단히 조밀한 데다 도로는 거의 없었고, 현지 지형을 잘 아는 독일 수비 병력이 요소에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갑차량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포탄은 종종 나뭇가지에 걸려 공중에서 폭발, 독일군이 갖고 있지 않던 근접신관(VT)의 효과까지 내 미군의 화력 우위가 크게 상쇄됐다.
    10월 5일에 9보병사단 전체가 투입돼 공격이 재개됐으나 열흘간 고작 3km 전진에 사상자는 4500명에 이르렀다. 16일부터는 28보병사단이 대체 투입돼 악전고투 끝에 11월 3일 간신히 슈미트 장악에 성공했다. 독일군도 이에 즉시 116기갑사단과 89보병사단에서 차출된 병력들의 반격으로 도시를 탈환했다.
    미군은 결국 슈미트 재탈환을 위해 미군 4보병사단 병력을 추가 증원, 일주일의 격전 끝에 목표를 달성했으나 이곳에서만 사상자가 무려 6184명이 났다. 이후로도 독일군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미군 배후로 침투하고 교란작전을 연이어 전개해 미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11월 16일부터는 미군 1·9군이 연합한 퀸 작전이 개시돼 전투가 한층 확대됐다. 5군단 병력이 연이어 11월 21일부터 작전의 주도권을 넘겨 받아 독일군을 서서히 숲 밖으로 밀어냈지만 하루 내내 고작 500m씩 전진하는 끊임없는 사상자 후송과 보충병 투입의 연속이었다.
    미군은 악마 같은 휘르트겐 숲 끝자락에 거의 도달했으나 밀어닥치는 겨울 앞에 전진은 더뎌졌고, 12월 12일 슈트라스 점령 이후 공격은 중지됐다. 곧이어 아르덴 전선에서 독일군의 야심찬 반격작전인 이른바 ‘발지전투’가 개시되며 휘르트겐 숲의 전투는 전면 중단됐다. 전투는 이듬해 2월에야 재개돼 결국 2월 10일 최종 목표이던 슈바메나우엘 댐을 점령하며 막을 내렸다.
    미군은 이 전투에 12만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목표 달성에 4개월이나 허비했고 사상자는 3만3000명에 육박했다. 참전한 장교들이나 역사가들은 모두 최고 지휘관 아이젠하워나 하지스 1군사령관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의 무책임한 방기에 그 책임을 돌렸다.
    미군은 극도로 불리한 전장에 진입했음에도 전략적 목표에 집중하지 않고, 슈미트 등 부차적인 목표 장악에 대규모 병력을 소진하면서 끊임없는 축차 투입을 반복했다. 공세의 초점마저 불분명했음에도 무언가 행동은 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귀중한 전력이 낭비된 셈이었다.
    모든 리더는 자신과 조직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끝없는 행동의 욕구를 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 가치 부여가 어려운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함을 휘르트겐 숲의 전투는 보여 주고 있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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