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패전속승리학

<67>둠루프나르 전투

입력 2006. 12. 1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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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와 나란히 3·4위를 한 기억으로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는 나라다.

    이러한 터키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터키의 성립 과정과 이웃 그리스와의 오랜 앙숙관계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터키의 뿌리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20세기 초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패전하면서 형편없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았다.1920년 맺어진 세브르 조약에서 승전국들은 주변 영토는 물론 중요한 토대인 소아시아 지방까지 점유했다. 이에 분개한 개혁파 장교들은 무스타파 케말 장군 지휘 하에 결집, 제국 정부에 반기를 들고 20년 4월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수립했다.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한 비잔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한 그리스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 연합국 중에서도 오스만튀르크 영토 분할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영국의 강력한 후원 하에 1919년 이즈미르를 통해 소아시아에 침공한 그리스군은 터키의 혼란상을 틈타 내륙 깊숙이 침공, 터키 개혁파 신정부를 위협했다.그리스군의 진격은 21년 1월 이뇌니 전투에서 정지할 때까지는 순조로웠다.

    우세한 병력을 앞세운 그리스군은 다시 6월에 앙카라 서쪽 100㎞ 사카라 강변에서 대공세를 재개하면서 터키군 주력을 끌어들여 섬멸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전황은 급변했다. 국제정세 또한 프랑스·이탈리아가 그리스의 팽창을 견제하고, 소련이 터키를 적극 원조하면서 영국도 친 그리스 정책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결국 22년에 들자 그리스는 점령지를 고수한 채 이스탄불로 공격의 창끝을 돌렸다.

    터키군도 부족한 전력을 착실히 끌어올리며 돔루프나르 일대의 전선 돌출부에 역공을 가할 준비를 했다. 그리스군은 병력이나 중소형 공용화기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점점 전의를 고조시키는 터키군과 달리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급사한 이후 가열되는 권력 투쟁의 홍역을 겪었다. 베니줄로스 수상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며 군내 지지세력도 연달아 숙청돼 야전 지휘관들이 여럿 교체됐다.

    8월 26일 그리스군 9개 사단 25만 병력이 포진한 돔루프나르 돌출부에서 공세에 나선 터키군은 1군 예하의 6만 병력뿐이었다. 터키군은 돌출부 북측익 방어를 거의 포기하고 4개 사단을 남측익에 집중시켰다. 터키군은 먼저 중포를 집중해 그리스군 포대 제압에 성공했고, 이 여세를 몰아 다음날 에르크멘산 정상에 육박했다. 고지선을 따라 형성된 방어선 돌파에 성공하며 터키군은 우세한 기병 전력을 총동원해 그리스군 후방으로 진출,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군 주력은 8월 30일 완전히 포위됐고, 9월 3일부터 전의를 상실하며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터키군은 여세를 몰아 단숨에 무려 400㎞를 추격해 들어가 9월 16일 전 그리스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신생 터키는 케말 장군 지휘 하에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립전쟁에 승리했으며 이듬해 7월 로잔조약으로 국제적 지위를 승인받았다.

    그리스군은 돔루프나르 전투까지도 우세한 전력을 구가했음에도 고토 회복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에 집착, 장기간의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지 못했다. 부족한 정훈교육에 더해 본국의 정쟁까지 닥치면서 장교들까지 원정의 목표에 혼란을 겪으면서 끝내 일대 붕괴로 패전에 몰렸던 것이다.반면 터키는 영토 사수의 신념과 국가개혁의 의지로 열세를 딛고 극적인 대반전에 성공했다. 터키는 이후 매년 8월 30일을 국경일인 ‘승리의 날’로 지정, 돔루프나르 전투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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