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패전속승리학

<66>이오지마 전투

입력 2006. 12. 0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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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감독으로 성가를 드높이는 왕년의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올해 미일 양국의 주목을 동시에 끌고 있다.

    이오지마 전투를 미국의 시각으로 조망한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과 일본의 시각으로 조망한 ‘이오지마에서 보낸 편지’를 연이어 발표한 것.

    전후 60년이 지난 진부해 보이는 소재임에도, 스리바치산 정상의 성조기 게양 순간(사진)은 여전히 미 해병대 역사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이오지마가 주목을 끈 배경에는 맥아더의 육군과 니미츠의 해군 사이의 경쟁이 있었다. 대만 공격을 주장하는 육군에 맞서 해군은 이오지마를 거쳐 오키나와 진공을 주장했다. 팽팽한 긴장은 전략폭격을 담당한 육군항공대 사령관 아놀드가 폭격기의 임시 기착지로 이오지마 확보를 지지하면서 해군 쪽으로 기울었다. 1944년 10월 오키나와 공격 이전의 손쉬운 전초전으로 이오지마 공격작전 입안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군의 예상과 달리 44년 5월 오가사와라 제도의 방어책임을 맡은 쿠리바야시 중장은 이오지마 상륙을 예견하고 방어체계 혁신에 나서고 있었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제도 중심이던 치치지마를 포기하고 사령부와 109사단 주력, 각종 중화기를 이오지마에 집결시켰다. 45년 2월까지 일본군은 육·해군을 합쳐 2만1000여 명의 수비대가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군의 대 상륙작전 전술개념 발상을 바꿨다. 이전까지 상륙부대가 접안하자마자 해안에서 격퇴하고, 대규모 야습을 활용해 적을 무력화한다는 전술을 과감히 포기했다. 상륙 초반에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다가 미군이 해안선에서 500m 정도 진입하면 일제사격을 가하기로 했다. 무의미한 만세돌격도 엄금했고 단계적으로 퇴각하며 미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 28㎞에 이르는 지하갱도 공사에 나섰다.

    45년 2월 19일, 사흘간의 예비 포격에 이어 9시에 상륙한 미 4·5해병사단은 처음 너무나도 조용한 해안 분위기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10시부터 쏟아진 일본군의 포화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날 사상자만도 2300명에 달했다. 당초 5일이면 충분하리라던 작전은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에 막혀 한 달 이상을 끌었다. 결국 3월 26일, 쿠리바야시 이하 잔존 일본군 수백 명이 미군 진지에 마지막 일제돌격을 감행해 전멸하고서야 전투는 종결됐다.

    미군은 간신히 이오지마를 장악했으나 전사 6821명, 부상 21865명에 이르러 일본군보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 막대한 피해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후 미군은 전략폭격 거점으로 이오지마 가치를 크게 선전해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실제 그만한 가치가 없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오지마의 일본 항공기들은 전멸지경이었고, 미군 폭격기들의 불시착 비율도 무시할 수준이어서 대일 전략폭격 추이에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이런 미군의 안이한 가치 판단과 대조적으로 쿠리바야시 중장은 일본군의 형식주의를 탈피, 축성작업 중에는 군례를 지키지 말도록 하면서도 가용시간의 3분의 2를 전술훈련에 할애하는 철저한 실용적 자세를 견지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군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절망적 상황에서도 최대의 지혜를 짜낸 방어 노력 앞에서 미군은 상처뿐인 승리를 얻어야만 했던 것이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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