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패전속승리학

<64>피그만 침공

입력 2006. 11. 2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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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소 양국을 전쟁 일보 직전으로 몰아넣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단호함을 과시해 지도자로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하지만 사실 미국의 연이은 대쿠바 정책의 실패가 빚어낸 아찔한 종착점이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그 배경에는 바로 1년 전의 피그만(灣) 침공이라는 악수가 있었다. 59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은 3년여의 투쟁 끝에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고 이른바 쿠바 혁명을 이뤄냈다.

    이어 카스트로 정권은 비동맹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며 쿠바 영내 미국의 기득권과 사유재산을 몰수했다. 미국으로서는 플로리다에서 180㎞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바에 반미 정권이 있다는 사실이 편할 리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뒤이은 케네디 행정부 모두 쿠바의 친미 정권 회복을 간절히 바랐다.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란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킨 경험을 살려 옛 바티스타 정권 출신의 반군들을 지원, 쿠바 신정권을 쉽게 전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CIA는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2506여단이라는 비밀 부대를 훈련시켰다.행정부가 작전 결행을 결정하면 이들은 트리니다드에 상륙, 교두보를 장악하고 기존 반정부 세력과 연대해 상황에 따라 수도 하바나로 진격하든지 산악지대에 은거해 게릴라로 활동할 계획이었다.61년 4월 의욕이 앞선 케네디 대통령은 CIA의 호언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쿠바 공군기로 위장한 폭격기들이 쿠바 내 주요 공군기지를 기습, 제공권을 확보하고 2506여단은 당초 계획과 달리 피크만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이곳은 하바나와 훨씬 가깝다는 이점은 있었으나 초반 기선 장악에 실패할 경우 퇴각이 여의치 않은 곳이었다. 상륙 이후 반 카스트로 봉기를 자신한 CIA와 이에 솔깃했던 케네디 행정부 인사들은 이러한 위험 요소들을 무시했다.작전은 4월 17일 결행됐다. 4척의 수송선에 분승한 1511명의 대원은 의기양양하게 상륙했다.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 쿠바 국민들의 시선은 냉랭했다. 카스트로도 이미 정부 내 위험 인사들을 구금하고 진압군을 출동시킨 상태였다.

    21일, 나흘간의 격전 끝에 2506여단은 115명이 전사하고 1189명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를 배후 조종한 케네디 행정부의 위신도 매우 크게 손상됐다.작전이 실패한 것은 여러 위험 요소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케네디 행정부의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었다. 미국은 쿠바 정세를 잘못 판단했다. 또 소련 KGB가 미국의 작전 첩보를 입수, 카스트로에게 미리 경고한 사실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미 행정부에는 최고의 지성이라 평할 만한 러스크·맥나마라·슐레진저 등이 포진하고 있었으나 빠른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강박적 회의 분위기에서 이들은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른바 ‘집단사고’(groupthink)라고 불린 의사 결정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집단사고’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안에 대한 분석이나 이의 제기를 억제하고 합의를 쉽게 이루려고 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긴밀하고 통일된 행동을 요구하는 집단에서 이러한 위험은 더욱 고조되는 법이다. 단호한 행동은 반드시 필요한 리더의 자질이다. 하지만 항상 있을 법한 위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참모를 두고 그들이 직언할 수 있도록 해 ‘집단사고’를 방지하는 것 또한 리더십의 핵심 요소인 것이다.

    <채승병 전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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