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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엮는軍 軍人 軍隊<5>신라 세속오계 소재 세인의 관심

입력 2005. 07. 2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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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를 소재로 한 우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화랑도’와 관련된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화랑정신, 즉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소재로 한 2000년도 발행 우표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세속오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 임금을 섬겨라)을 비롯해 효도를 강조한 사친이효(事親以孝), 벗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교우이신(交友以信), 무사의 길을 밝힌 임전무퇴(臨戰無退), 그리고 생명 존중 사상을 강조한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건국(B.C. 57년)했지만 일찍이 화랑도라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어 마침내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귀족의 자제들에게 ‘화랑’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무리를 거느릴 수 있도록 했다. 이 무리는 낭인 또는 낭도로 불렸다.
    화랑 한 명이 300~500명의 낭인을 이끌었다. 화랑은 이들을 수려한 산이나 강으로 끌고 다니며 단결력과 무사정신, 정서 교육 등을 통해 용맹한 전사로 길러내 국가에 충성하는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 유명한 화랑정신은 일종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 진흥왕 때 원광 법사가 만들었다. 이 율법을 통해 수많은 화랑은 훌륭한 장군으로 성장, 고구려·백제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되고 결국에는 통일 신라의 가장 확실한 밑거름이 된다. 대표적인 화랑으로는 김유신을 비롯해 흠순·품일·관창·반굴·원술 등이 있다.
    화랑도를 바탕으로 힘을 기른 신라는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당나라도 끝내 이 땅에서 몰아내 676년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낸 장면도 ‘신라의 당군 격퇴’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에 우표로 발행된 바 있다. 신라와 당나라의 회심의 일전은 기벌포(伎伐浦) 해전이라 할 수 있는데 676년(문무왕 16년) 신라 해군이 지금의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당나라 해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앞서 신라와 당나라는 645년 군사 동맹을 맺고 연합해 660년 백제를 무너뜨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야심을 드러내 이 두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들었고 급기야 신라마저 지배하려고 했다.
    그리고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백제·고구려의 평양 이남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 분할 약정마저 어김으로써 신라는 독자적으로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적극적인 점령 정책을 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침내 나당(羅唐) 전쟁이 벌어졌다. 신라·당나라의 싸움은 670~676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됐는데 신라가 675년 매초성(買肖城)에서, 이듬해 기벌포에서 당나라를 크게 무찔러 나당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676년 11월에 있었던 기벌포 해전은 당나라 군사가 북쪽의 천성(泉城)과 매초성에서 신라군에 크게 패해 설인귀(薛仁貴)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남하하자 신라군이 기벌포에서 이들을 공격해 이긴 싸움이다.
    신라는 673년 함선 100척을 보내 서해를 지키면서 적극적인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676년 설인귀의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이곳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해군이 졌으나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결국 당나라 해군을 크게 무찔러 적군 4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전투는 매초성 싸움과 더불어 나당 전쟁을 끝맺는 중요한 싸움으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할 수 있었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이 지금의 금강이므로 금강 입구가 기벌포로 알려져 있다.

    <이영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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