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은 오늘의 영국통일을 이룩한 17세기 출중한 정치가 겸 군인이다. 그는 영국 내란 때 의회군을 지휘, 왕당파군에 승리를 거두고 영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정의 토대를 이룩한 인물이기도 하다.
크롬웰은 영국을 2세기 동안 알려지지 않은 국가에서 군사강국으로 재편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영국 제도(諸島)를 무력으로 통일한 다음 호민관 자격으로 영국을 왕정과 공화정의 혼합정치체제로 이끌었다. 그는 이 시기에 탁월한 능력과 혁신적인 최고 군사지도자로서 국민들에 대한 비범한 이해심과 잔혹하리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 영국군을 최초로 전형적 직업군인으로 육성한 인물이다.
크롬웰은 1599년 4월25일 영국 동부 헌팅턴의 상류사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청교도 집안으로 어릴 적부터 종교적 신앙은 크롬웰에게 인격형성과 성장의 핵심이 됐다.
크롬웰은 20대까지 청교도 신앙생활을 열성적으로 해왔다. 그는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 나라를 영국국가교회와 로마 가톨릭교의 영향을 가진 정치구조로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때부터 영국에서 크롬웰의 정치적 야심과 종교적 신앙 및 편견을 구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헌팅턴 그래머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런던 링컨스 인에서 법률공부도 했다. 크롬웰은 1620년 결혼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영토관리에 전념했다. 크롬웰은 이 무렵 신앙심에 눈을 떠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1628년 헌팅턴 하원의원이 됐으나 1629년 찰스 왕이 의회를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후 단기의회와 장기의회 시절 케임브리지에서 선출돼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1642년 찰스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반군의 지지를 받는 의회파 간에 제1차 내란이 터지자 의회군 에섹스 백작과 함께 기병대를 조직, 부대를 인솔해 에지힐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크롬웰은 이때 최초로 전쟁하는 군대에 가담하게 됐다. 일설에는 크롬웰이 젊은 시절 한때 유럽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런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크롬웰이 최초로 군대에 가담했을 때는 43세로 비교적 나이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 기병대를 창설, 처음으로 군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장병들이 봉급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청교도적 도덕성 및 규율 준수와 정직성 기준에 맞게 처신할 것을 요구했다.
크롬웰은 또 장병들이 명령에 즉각 반응할 것을 요구하고 약탈과 신을 모독하는 욕설 혹은 기타 신성모독 행위를 일절 삼갈 것을 명령했다. 적군들이 종교적 열정이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않고 있다는 확신이 크롬웰의 군사전략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종교적 신앙에 바탕한 군사규율과 기강을 유지함으로써 적군과 싸워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크롬웰은 장병들을 가장 현대적 무기로 무장시키고 가장 잘 훈련된 말을 타게 함으로써 최상의 전투여건을 제공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항상 봉급날을 엄격히 지키면서 충분한 보수를 지급, 군의 사기를 최고도로 유지했다.
크롬웰이 기병대를 잘 훈련시키고 전투에서도 늘 승리할수 있었던 비결은 엄격한 군기확립이었다. 크롬웰은 항상 끊임없는 군사훈련과 강력한 지휘자 확보에 힘썼다. 그가 공격부대에 대해 공격 중 전투대형을 재편성토록 지시하고 이미 시작된 공격대열의 방향마저 중도에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물샐틈없는 대비태세 덕분이었다.
크롬웰의 전술은 휘하부대의 군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기병대는 당시 전형적 전투방법인 전속력 달리기를 하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전투 도중 적진의 상황변동과 약점을 잘 이용하고 즉각 대응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크롬웰은 기병들에게 프린트 권총을 허리춤 총집에 넣고 다니게 함으로써 말 위에서 적군과 신축자재한 전투를 할 수 있게 했다. 기병들은 적군이 가까이 왔을 때 총집에서 총을 뽑아 발사하고 이어 길이 3피트의 쌍날 칼을 뽑아 적진을 돌파하곤 했다.
〈남북전략연구소장 여영무www.libertyclu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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