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피로맺은우방

<7>한미군 선의의 ‘입성’ 경쟁

입력 2003. 10. 0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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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10월19일,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이 유엔군 중에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유엔군과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전 전선에 걸쳐 반격작전을 전개했고, 10월1일 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마침내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수복한 것이다.

    사실 국군 제1사단은 처음부터 평양 탈환의 선봉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최초 작전명령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주공을 맡아 경의국도를 따라 돌진하고 미 제24사단은 우익부대로 구화리∼시변리∼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을 공격하게 돼 있었다.

    그리고 영국 제27여단은 군단예비로 기병사단을 뒤따르고 국군 제1사단은 개성∼연안∼해주를 거쳐 안악 방면으로 공격, 후방의 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백장군은 아무리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수도를 공격하는 데 국군이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작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자 밀번 군단장은 1사단의 차량이 몇 대인지 물었는데, 그것은 곧 1사단의 기동력을 묻는 질문이었다. 사실 당시 1사단은 60~70대의 차량뿐이었으나 미군 사단은 수백 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동력·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 평양을 점령하려는 밀번 군단장을 상대로 백장군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차랑은 많지 않지만 주야로 행군할 투지가 있다”는 백장군의 강력한 의지에 밀번 군단장은 결국 국군 제1사단을 평양 탈환의 선봉에 서게 했다.

    드디어 진군이 개시됐는데 백장군은 선두전차에 탑승, 진두지휘했다.

    그러자 수석고문관 헤이즈레트 중령이 반대하고 나섰다. “사단장이 선두에 나서면 적 저격수의 표적이 되고 만약 저격되면 누가 사단을 지휘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장군은 고향을 탈환하겠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국군과 미군의 제 병과가 협조하는 데 언어의 장벽, 훈련도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 등으로 지휘통솔이 어렵기 때문에 사단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50년 10월19일 오전 11시, 마침내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의 합류지점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도달했고, 그로부터 약 40분 후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가 도착했다.

    38선 고랑포에서 평양까지 약 170㎞인 것을 감안하면 국군 제1사단은 하루 평균 25㎞를 진격한 셈이다. 이 속도는 쾌속 진격으로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기갑부대의 스탈린그라드 침공시보다 오히려 더 빠른 것이었다. 1사단 장병들은 걷고 타기를 번갈아 가며 불철주야 진군, 태평양 전쟁에서 마닐라와 도쿄에 1착으로 진주한 전통에 빛나는 미 제1기병사단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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