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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천상륙 신념의 승리

입력 2003. 09. 2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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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싱턴이 이 작전을 5000분의 1의 도박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본인의 결의는 확고합니다. 기필코 결행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5000분의 불가보다 1의 가능성을 어디까지나 믿고 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950년 8월23일·도쿄)



    1950년 9월15일. 이날은 일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전이 진행 중이던 그 무렵 6·25전쟁의 국면을 바꿔 버린 일대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사실 인천항의 입지조건 때문에 미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을 완강히 반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워싱턴도 상륙작전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상륙작전은 필요하지만 ‘인천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들의 반대 이유인 인천의 지형적 장애요소가 오히려 북한군으로 하여금 인천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므로 이러한 허점을 역이용할 경우 기습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소신을 거듭 강조했다.

    D데이를 6일 앞둔 9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마침내 ‘귀하의 계획을 검토한 결과 승인키로 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로 했다’는 최종결정을 맥아더 장군에게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신념이 관철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그것은 수세에 몰린 전황을 공세로 역전시키는 계획이자 시기의 선택 및 방법의 모든 면에 걸쳐 놀라운 진면목을 발휘한 작전이었다. 숱한 악조건을 오히려 기습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한 이 작전의 성공으로 아군은 적의 병참선과 퇴로를 차단, 적을 격퇴했으며 순식간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이 작전은 아군의 인적·물적·시간적 손실을 극소화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작전완료. 적군의 저항은 극히 경미함. 포로 45명. 전사 한 명도 없음.”

    오전 6시27분 선발 제1파의 상륙함정 8척에 ‘Let’s Go!’가 발령되고 나서 8시에 상륙성공의 제1보가 날아든 것이다. 월미도를 단숨에 점령한 선발부대의 보고였다. 탁월한 전략가인 맥아더 장군의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민 모두를 대신해 감사했으며, 처칠은 “시간을 벌어 반격하는 전략의 진수를 보여주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곧 서울 수복을 앞당겼다. 9월28일. 총성은 북쪽으로 멀어지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국군 해병대 제6중대 박정모 소대의 수훈이었다. 서울의 해맑은 가을 하늘에 교회 종소리와 함께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울시민들에게는 실로 89일 만에 바라보는 태극기였다.

    다음날. 서울 환도식장에서 맥아더 장군은 연단에 올라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가호로 인류 최대의 희망과 열정의 상징인 우리 유엔군은 여기 대한민국의 오랜 수도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이제 서울은 잔학한 공산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존엄성을 누리게 됐으며,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 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습니다.”-정일권 장군 회고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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