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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군사 >국군 건설의 아버지 이범석

일·중·러 압박…항일 투혼으로 난관 극복

<23> 시련의 시대
2018. 06. 19   16:56 입력



공산 러시아에 무장해제 당하고

일제와 中 군벌들에게 쫓기면서도
만주와 연해주서 항일투쟁 이어가
1925년 혁명동지 김마리아와 결혼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공산 러시아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주에서도 중국 군벌들로부터 신변을 보호받지 못하며 무력화된다. 철기 또한 무장투쟁은 고사하고 일제 특무기관과 중국 군벌들로부터 쫓긴다. 생존하기도 바쁜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역경 속에서도 철기는 결코 좌절하거나 노선을 변경하지 않았다. 오직 독립된 나라를 꿈꾸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 바탕은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시대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그의 호 ‘철기’가 의미하듯 강철 같은 의지력이었다.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서 출동한 일본군.

연해주에서 고려혁명군 기병사령이 되다


1921년 10월경, 철기는 러시아령 이만 시에서 다시 중국 만주로 넘어가기 위해 5명의 동지와 함께 어두운 밤에 우수리강을 헤엄친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은 전사하고 철기를 포함한 세 명만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러시아 탈출 후 철기는 홍개호 근처 쾌당별이라는 마을에서 잠시 자치대 병력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가 신병치료로 잠시 부대를 비운 사이 마을은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 철기는 다시 무적(無籍) 신세가 됐다.

당시 자유시 참변 이후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기회를 봐서 만주로 다시 넘어왔다. 김좌진·조성환 등 북로군정서 계열 지도자들은 흑룡강성 일대에 흩어져 러시아에서 넘어오는 이전의 동지들을 맞이했다. 자급자족하며 장기전 태세로 앞날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 여건은 나날이 악화돼 갔다. 일제는 간도 학살로 지역 독립군 기반인 한인사회를 붕괴시켰다. 이어 독립군들이 다시 조직을 정비해 나가자 만주 지역 중국 당국을 압박했다.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는 한 중국인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제의 논리였다. 한·중 양국인들 사이를 이간시키는 이러한 책략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이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중국 봉천성 경무국과 소위 ‘삼시협정’(일명 미시협정: 한인 통제에 관한 조선총독부와 중국 봉천성 간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근거로 양국 기관은 한국 독립군과 배일 한인에 대한 탄압령을 발령하고 혹독한 탄압을 벌였다.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독립군 세력 일부는 다시 연해주(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동해의 연안에 있는 지방. 면적은 한반도의 약 4분의 3)로 건너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은 20만여 명에 달했다. 이 지역의 한인 무장투쟁은 주로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우수리스크 북쪽의 이만(현 달레네첸스크) 시, 그리고 우수리스크 동북쪽의 수이푼 지구, 그리고 우수리스크 동남방 산악 지역의 수찬 지역 등이었다.

1922년 중순, 수이푼 지구에 있던 고려혁명군이라는 빨치산 조직이 일본군과 전투 중 지휘부가 와해되자 자유시 참변에서 살아나온 노은 김규식 선생(1882~1931·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을 사령관으로 초빙했다. 김규식은 조직 강화를 위해 청산리 전투에서 명성이 높은 철기를 기병사령으로 끌어들였다.

고려혁명군은 태동단계에서는 러시아혁명을 위한 한인 빨치산 중심으로 결성됐다. 그러나 김규식과 철기가 합류한 이후로는 항일투쟁을 위한 민족주의적 성격의 무장조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러시아혁명 완성 전까지 수년간 일제와 백계 러시아군에 대항하는 합동민족군으로 활약했다.

이 시기에 철기는 후일 평생 해로하게 되는 김마리아를 만난다. 김마리아는 시베리아에서 태어난 한인 2세였다. 그녀는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정치부원이 되어 합동민족군 기병지휘관인 철기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철기를 만나게 된 배경이다. 상반된 입장의 두 사람은 그러나 나중에 연인관계가 된다. 청춘남녀의 만남과 인연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얼마 후 연해주에서는 백계 러시아군이 궤멸된다. 이어 볼셰비키 혁명이 완성되면서 일제의 시베리아 파견군 철병이라는 중요한 정치·군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러시아 연해주 일대 힘의 진공상태가 종료된 것이다. 이제 볼셰비키 권력은 본격적으로 한인 무장세력의 무장해제를 추진한다. 토사구팽이었다.

연해주에서 무장해제가 본격화되자 한인들의 무장투쟁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1924년 초, 김규식 등은 이만을 탈출해 우수리강을 건너 만주 지역으로 돌아간다. 철기도 곧 러시아를 탈출해 만주로 돌아간다.

1925년 1월경, 철기의 고려혁명군 기병대가 수이푼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러시아군이 습격해 왔다. 이때 철기는 이마에 총탄을 맞았다. 철기가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새어머니인 김씨는 마적이 우글대는 북만주를 뚫고 철기를 찾아온다. 모자간에 극적인 상봉이 이뤄진 것이다.


결혼과 고려혁명군 결사단 조직

철기의 고려혁명군 기병대는 만주로 들어가기 위해 수이푼강을 넘자마자 중국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강요받았다. 철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후 철기는 중국군의 정세도 알아볼 겸 잠시 만주 군벌인 장종창의 막료로 약 4개월간의 시간을 보낸다.

1925년 7월경, 철기는 김좌진으로부터 즉시 영고탑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당시 김좌진은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에서 신민부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한편 연해주에서 서로 연모의 관계였던 김마리아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철기를 찾아온다. 철기는 8월경, 석오 김학소 선생의 주례와 조성환·김좌진을 증인으로 김마리아와 결혼한다. 철기는 김마리아를 러시아어인 마르시아를 줄여 ‘무샤’라고 불렀다.

신혼도 잠시, 그해 9월에 철기는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오길밀로 이동해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한다. 그리고 관동군을 기습 공격하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1926년 7월경,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군대는 중국 통일을 위해 북벌을 개시했다. 장개석군은 만주의 유력한 한인 독립군 지도자인 김좌진에게 ‘공패성’이라는 밀사를 보내 동북 군벌 장작림이 중국 통일에 호응하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좌진은 철기에게 이러한 임무를 맡긴다. 만주의 반일 마적들을 규합해 장작림 군대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자칫 동북 군벌과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모험이었다.

철기는 4개월 동안 마적 20여 단체 6000~7000명을 규합해 위하현 일대에서 장학량의 친위부대를 격파한다. 하지만 공패성이 체포되고 비밀공작은 실패로 끝난다. 이 일로 장학량은 철기를 현상금을 내걸고 뒤쫓는다. 철기는 일제 관동군 특무기관과 동북 군벌로부터 이중 추적을 받게 된다.

1928년 들어 고려혁명군 결사단도 일제와 중국 군벌의 집요한 탄압으로 총 73명 중 7명만이 남게 된다. 다음 해인 1929년 가을, 철기는 결국 결사단을 해체하고 ‘김광두’라는 가명으로 무샤와 함께 만주와 외몽골 접경지역인 할라주 산악지대로 피신한다.

이사이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은 1929년 9월 4일 황고둔에서 관동군에 의해 폭살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장학량이 실권을 잡으며 반일로 돌아선다. 바야흐로 만주사변 직전이었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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