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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주차 시사안보-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

2013. 11. 29   14:30 입력 | 2013. 11. 29   14:33 수정


 

 

 지난달 28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고(故) 채명신(蔡命新) 장군의 영결식이 거행됐다. 영결식은 5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장(陸軍葬)’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나고 “함께 싸웠던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장성묘역이 아닌 월남전 참전용사 제2묘역에 안장됐다. 장성 출신이 일반 사병묘역에 안장된 것은 국립현충원 설립 이래 처음으로, 전우들을 위하는 고인의 숭고한 정신은 후배 장병들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귀감이 되고 있다.

 

 故 채명신 장군은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1947년 월남해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생으로 입교했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그의 첫 직책은 제주도 9연대의 소대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군 생활의 통솔철학이 된 ‘골육지정(骨肉之情)의 리더십’을 터득하게 된다. 광복 직후 첨예한 사상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제주도에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 덕분에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지휘관이 늘 장병들과 함께하며 형제처럼 돌보다 보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첫 번째 회고록 ‘사선(死線)을 넘고 넘어’에서 “부하가 생명을 바쳐 상관을 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골육지정’의 통솔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며 “자신을 따르는 부하가 많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한 경험은 채명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하들과의 결속력과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전투부대를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그는 늘 후배들에게 “전장에서 부하들의 피를 덜 흘리게 하기 위해서는 평시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해 강한 군인으로 육성해야 하며, 전투에 임해서는 솔선해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군인정신’이 전투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다. 채명신 장군에게 ‘전장의 불사조’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6·25전쟁 당시 우리 軍 최초 정규 유격전 부대인 ‘백골병단(白骨兵端)’이었다. 부대의 첫 출정을 앞두고 그는 장병들에게 “이제 우리는 적 후방으로 침투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중득생(死中得生)’, 즉 죽음 가운데 생을 쟁취하자”고 강조했다. 당시 함께 참전했던 부대원들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때 그분이 강조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채명신 장군(당시 중령)이 이끌었던 유격부대는 1951년 1월 30일 대구를 출발, 3월 29일 귀환할 때까지 적 후방에 침투해 혈전을 벌였고,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길원팔(吉元八)을 생포하는 등 놀라운 전과를 거뒀다.

 

 채명신 장군은 1965년 8월부터 3년 8개월간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했다. 그가 6·25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활용해 승리한 ‘두코(Duc co) 전투’와 ‘짜빈동 전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6년 8월 5일, 캄보디아 국경 4㎞ 지점 두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맹호기갑연대 소속 제9중대는 6배나 많은 북베트남군 2개 대대를 맞아 대승을 거뒀다. 두코 전투의 승리 이후 미군은 한국군이 적용했던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교리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하기도 했다.

 

 故 채명신 장군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참군인이었다. 그는 생전에 ‘6·25전쟁 특수유격전의 영웅’ ‘베트남전쟁 중대전술기지 전략의 대가’라는 등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베트남전쟁에서 미군들로부터 군신(軍神)으로 불렸던 진정한 전사였다. 그가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유는 치열한 전장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수호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귀국 후 그는 육군2군사령관을 거쳐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전역 이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 등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故 채명신 장군은 죽는 그날까지 조국과 전우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에서 “이제는 떠나도 여한이 없다. 다만,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조국수호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고 먼저 가신 전우들의 영령들 생각이 항상 마음에 남는다”고 이야기했다. 아마 그것이 “내가 죽으면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이유일 것이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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