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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군사 >국민과 함께한 국군70년 발자취

해군특수첩보대원 ‘X레이 작전’ 최전선에 섰다

33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대한민국의 ‘숨은 영웅들’
2018. 09. 12   15:27 입력

해군·해병대 인천상륙작전 최대 공로자

카투사 8637명 미7사단 부족한 병력 보충

재일학도의용군 자원 참전 ‘숨은 공신’

켈로부대·방첩대·경찰관도 승리 주춧돌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군이 실시한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대한민국 해군을 비롯한 8개국의 함정 261척과 한미연합군을 비롯한 병력 7만5000명이 동원됐다.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생애 최대의 걸작품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맥아더 장군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졌다. 6·25전쟁 발발 직후부터 수도 서울의 관문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구상했던 사람도 맥아더였고, 워싱턴의 펜타곤은 물론이고 휘하의 지휘관 및 참모들까지 반대하는 작전을 끝까지 설득하며 강력히 추진했던 사람도 바로 맥아더였다. 그런 점에서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20세기 최대의 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6·25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낙동강전선에서 공세의 끈을 놓지 않았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38선을 향해 무질서한 퇴각을 하게 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그런 북한군을 추격하며 38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다시 찾게 됐고, 전쟁 이전 국경선 역할을 했던 38선까지 회복했다.

인천상륙작전은 국제적 측면에서는 연합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해상 및 상륙작전이었으나, 국내적 측면에서는 해군·육군·해병대를 비롯해 카투사(KATUSA), 재일학도의용군, 켈로(KLO)부대, 경찰, 방첩대 등이 참가한 총력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8개국에서 261척의 함정을 보냈다. 대한민국 함정 15척을 비롯해 미국 225척, 영국 13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네덜란드 1척이 그것이다. 지상작전을 수행할 상륙부대는 미 해병1사단과 미 7사단, 그리고 연대 규모의 한국 해병대와 육군17연대였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과 참모진.  필자 제공

 


그런데 막상 인천상륙작전을 실시하려고 보니 상륙부대로 차출된 미 7사단의 병력이 완전 편성의 50% 수준밖에 안 됐다. 미 7사단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미 7사단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요청해 한국 청년들을 카투사라는 이름으로 미군에 복무하게 했다. 그 수가 무려 8637명이었다. 미 7사단 병력 2만4854명의 30%가 넘는 숫자였다. 이들 카투사는 미 7사단의 보병 및 포병중대에 100명씩 배치돼 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미 7사단에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 학생 78명도 자원해 참전했다.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최대 공로자는 대한민국 해군이다. 첩보수집부터 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해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의 역할이 컸다. 그 중심에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있었다. 국군 수뇌부 중 인천상륙작전을 제일 먼저 알았던 사람이 손원일 해군총장이다. 그는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첩보수집명령을 8월 중순에 전달받았다. 손 총장은 맥아더사령부에서 한국해군에 파견한 루시(Lousey) 미 해군중령으로부터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정보수집을 수행하라”는 맥아더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손원일 총장의 행보가 바빠졌다. 부산 임시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을 보고했고, 이어 인천상륙작전의 해상 및 첩보수집 거점 역할을 하게 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을 위해 이희정 중령이 지휘하는 702함을 비롯한 8척의 함정을 인천 해역으로 급파했다.

이희정 중령이 이끈 해군함정이 1950년 8월 20일 덕적도에 이어 영흥도를 탈환하자, 손원일 총장은 맥아더사령부로부터 부여받은 인천 지역 정보수집 임무를 해군본부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에게 맡겼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과 서울 등지의 북한군 무기와 병력배치 현황 등을 수집하라는 임무였다. ‘엑스레이(X-Ray) 작전’으로 명명된 이 작전에는 17명의 해군특수첩보대원들이 투입됐다. 이들은 북한군 복장을 하고 인천 등지의 적 병력과 장비, 방어상태 등을 수집해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에서 파견한 클라크(Eugene Clarke) 해군대위를 팀장으로 한 미 첩보부대에 알려줬다. 미 첩보부대는 이를 맥아더사령부에 보고했다. 당시 클라크 대위를 팀장으로 한 미군 첩보부대에는 정보통인 계인주 육군대령과 연정 해군소령, 그리고 최규봉을 비롯한 켈로(KLO)대원 20여 명이 있었다. 켈로부대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맥아더사령부 예하의 대북첩보수집기구다. 최규봉은 인천상륙작전 당일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 전공으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성조기를 수여받아 화제가 됐다.

인천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와 육군17연대가 작전부대로 참가했다. 이들 부대의 작전 참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던 3000명의 해병대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당시 위급하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손원일 총장에 의해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또 최초 상륙작전에는 한국 육군부대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알게 된 정일권 육군총장이 강력히 항의해 육군부대도 참가하게 됐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상륙작전에 참가할 연대 규모의 지휘관을 가장 용맹한 사람으로 선발하라”고 지시해, 당시 수도사단장이던 백인엽 대령이 뽑혔다. 그때 신성모 장관이 백인엽 사단장에게 “사단장에게 연대장 직책을 수행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떠냐? 중대장도 괜찮다”고 말해, 백 대령이 육군의 상륙부대 지휘관으로 선발됐다.

맥아더 장군이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은 최초 대한민국 해군과 첩보부대에서부터 시작돼 해병대, 육군17연대, 미군 속의 한국군인 카투사, 켈로부대, 방첩대, 경찰관, 재일학도의용군의 도움으로 성공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들의 역할과 활약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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