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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기사 게시 일시 : 2013-01-05 05:42

박양호
대한학도의병 명예선양기념사업추진위원장·전 감사원 사무차장

 스탈린에게 전쟁 재가를 받고 중국으로부터 병력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명령을 내렸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한강인도교가 끊겼고 정부는 부랴부랴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이 땅에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혈기왕성한 애국 학생들이 있었다.

 대한학도호국단 소속 간부와 단원 200여 명이 6월 28일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조직, 이튿날 한강방어선의 노량진 지역에서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학생들의 종군은 시작됐다.

 이후 대구로 내려간 비상학도대는 7월 20일 동아극장에서 ‘애국학도총궐기대회’를 갖고 대전의 의용학도대와 통합해 대한학도의용대로 확대 개편했다. 이들은 대구역 앞에서 학도의용군 모집, 피란학생 규합 등 군 업무에 동참했다. 7월 초 부산학도의용대 350여 명의 학생들은 8사단에 편입, 팔공산전투에 참전했다가 대부분 희생됐고 800여 명의 학생들은 육군특무부대장 하갑청 장군 지휘 하에 특공대를 조직했다. 이 밖에도 7월 27일 육군본부 정훈감실 소속으로 학도기간대(1500여 명)가 창설돼, 밀양에서 창설된 유격부대에 편입됐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된 북한군과 지방 좌익세력이 호남지구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일 때는 학도의용군 5000여 명이 후방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투입됐다. 수복지역에서는 북한 학생 4000여 명이 학도호국단·학도의용대 등을 조직해 군 작전에 참여했다가 1·4후퇴 때 남하해 군에 입대하거나 학도의용군으로 종군했다.

 이처럼 학도의용군은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고 북진작전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50년 8월 11일 포항에서 밀려드는 북한군을 막아낸 71명 학도의용군은 빼놓을 수 없는 6·25 전투사 중의 하나다.

 6·25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의 역할은 지대했지만 학도의용군의 정확한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전상자에 관한 통계가 오늘날까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한학도의용대에서는 전쟁 기간에 전투참전·치안활동·가두선전·후방선무공작 등에 참가한 학생을 27만5200여 명으로 집계했다. 1957년 중앙학도호군단에서 작성한 ‘전몰학도 명단’에 의하면 전투 참가 학생 2만7700여 명 중 전사자가 1394명이다.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 명 중 70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전쟁기념관 학도의용군 코너에는 전국 349개 중학교에서 모두 1976명이 전사한 것으로 동판에 새겨져 있는 등 학도의용군에 관한 통계가 각 기관마다 다르게 기록돼 있다.

 6·25 참전 학도의용군 중에 생존한 사람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관계기관에서는 더 늦기 전에 학도의용군 전사를 반듯하게 정리해 널리 알려 후대의 표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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