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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평양진격과 김일성 생포작전

기사 게시 일시 : 2013-01-05 03:20

국군1사단 맨 먼저 평양 입성

▲한미연합군의 평양 탈환작전

평양 탈환작전은 북진 당시 서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1사단과 미1기병사단이 중부전선으로 진출한 국군7사단 8연대와 함께 평양을 포위 공격해 탈환한 공격작전이다. 당시 북한군은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평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고 대동강·동평양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 완강한 저항을 기도했다.

그러나 적의 저항은 그들의 주요 기관이 철수할 시간을 얻고 후퇴하는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미8군 정보참모부가 판단한 평양방위부대는 북한군 17사단과 32사단의 잔류병 약 8000명으로 편성된 혼성부대였다.10월 9일 38선을 돌파한 미8군의 군사목표는 적의 심장부인 평양 탈환이었고, 이 임무는 미1군단에 주어졌다.

이에 따라 평양을 목표로 미1기병사단과 국군1사단이 경합을 벌이게 됐고,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뒤늦게 국군7사단이 평양점령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의한 평양 탈환작전부대는 미1기병단과 국군1사단이다.

평양 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11일 만인 10월 19일 국군1사단 11·12연대와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1사단 15연대와 7사단 8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함으로써 종료됐다. 이때 국군1사단은 오전 11시 맨 먼저 평양시내로 돌입, 평양 첫 입성의 영광을 안게 됐다.

이로부터 중공군 1차 공세 때까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됐다. 그러나 평양을 점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북한의 수뇌부는 이미 평양을 버리고 함경도나 중국으로 들어간 후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한 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생포작전

평양 탈환작전에 즈음해 유엔군사령부는 김일성을 생포함과 동시에 패주하는 적의 주력 부대를 차단, 섬멸하고 미군 포로를 구출하기 위한 대규모 공정작전을 수립했다. 출동부대는 미187공수연대전투단이었다. 작전은 원래 10월 17일로 계획됐으나 지상군의 진격 상황과 기상이 나빠 평양 탈환 다음날인 10월 20일 실시됐다. 작전에는 미군 수송기 200대와 병력 4000명이 투입됐다.

그러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미리 빠져나가고 북한군 1개 연대만 걸려들었다.국군정보에 의하면 김일성이 평양을 빠져나간 것은 10월 16일 새벽 2시였다. 이는 김일성을 호위하던 군관 한 명이 희천에서 국군7연대에 투항, 김일성의 도주행각을 털어 놔 알게 됐다. 김일성은 볼가라는 소련제 고급승용차를 이용했다.

그날 새벽 평양에는 가을비가 세차게 내렸다고 한다. 김정일은 당시 10세였는데, 10일 전 이미 만주 장춘으로 피난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순천~개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그리고 희천에 이르렀을 때 난관에 부닥쳤다. 것은 승용차길이 막히고, 그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던 반공애국주민들이 봉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 소식을 전해 듣고 내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 북한군 패잔병들을 공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려 찻길을 포기하고 산길을 이용해 10월 26일 강계 근처 별오리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 후인 1950년 12월 별오리에서 개전 이후 6개월간의 전쟁을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했던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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