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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완결 고대동아시아세계대전

고대동아시아세계대전

제목만 보기 | 제목+내용
‘당과의 군사적 긴장’ 신라 왕권 강화 원동력 - 2014. 07. 28.
나당 전쟁 후 25년간 양국 신경전신문왕에게 사신 보낸 당고종 태종무열왕 추존명 개칭하라 협박‘당의 재침’이라는 공포감 술렁전쟁 재발 두려워하는 진골귀족 하나로 모아 결사항전의 길 선택나당전쟁(670∼676년)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전쟁 이후를 평화기로 상정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놓고 본 것이다. 나당전쟁 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후(戰後)에 바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唐 보급선단 격침 ‘천성해전’ 승리가 매초성에선 말갈군대 말 버리며 퇴... - 2014. 07. 21.
매초성 부근 세 번 패배… 겨울 오자 열여덟 번 싸움 모두 이겨천성전투서 보급로 차단 성공, 굶주림 불안감에 저항 없이 철수강자인 당은 선택권이 있었다. 전쟁을 지속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전쟁의 승패도 당의 국가 존속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반대로 신라인들에게 패배는 국가의 종말을 의미했다. 나당전쟁은 쉼 없이 지속된 것이 아니었다. 강자인 당이 처한 형편에 따라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고 재개되기도 했다. 하...
674년 나당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시기에 신라 문무왕이 조성한 안압지. 전쟁으로 청춘을 보낸 문무왕은 지친 마음을 안압지를 바라보며 달랬을 것이다. 
필자 제공 
평지전투 강한 唐에 참패 석문에서 쓴 눈물 삼키다 - 2014. 07. 14.
671년 10월 대동강에서 당 보급선을 격침시킨 결과 얻어낸 근 1년간의 전쟁 소강 상태는 신라가 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제적 상황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이 절호의 기회가 되고 가뭄에 단비일 수도 있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었다. 토번ㆍ당의 평화사절 교환 672년 4월 9일 토번 섭정 친링(欽陵)이 평화사절단을 장안에 보냈다. 당 고종은 토번 사절 중종(仲琮...
신라, 대동강서 唐 군량선 격침적의 숨통을 죄다 - 2014. 07. 07.
신라 인적자원 보충 절실해 백제인 구성 ‘백금서당’ 운영대기병 장창보병부대 창설 당 기병의 일방적 우세 꺾어세계 최강국 당나라와 전쟁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적 자원의 감소가 예상되는가? 근 100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에서 더 많은 피를 흘렸으며, 민간인들은 더욱 빈번하게 공격을 당했다. 재산은 일상적으로 파괴됐고, 군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규모의 팽창은 전장과 군인들을 더욱 효율적...
티베트, 실크로드 장악하고 唐의 11만 울부짖는 망령들 그 목소리 흑~흑 울... - 2014. 07. 02.
당군 11만 청해호 부근 진지 구축 초반 승리 불구 지원시기 놓쳐 궤멸 당, 숨고르기… 신라는 인적자원 한계670년 7월께 당나라 군대 11만이 청해호 부근에 도착했다. 이 염호(鹽湖)의 면적은 4340㎢로 서울의 7배다. 북쪽에서 여러 하천이 흘러드나 배출 하천이 없다. 당군은 토번을 이곳에서 몰아내야 서역의 실크로드를 탈환할 수 있고, 서역의 길목인 하서회랑을 지켜낼 수 있다. 설인귀가 총사령관이었고, 그 아래에 곽대봉(...
고구려부흥군 동원‘唐 축출’ 의기투합 - 2014. 06. 25.
당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시야가 넓어야 했다. 시력이 밝지 않아 멀리 보지 못하면 생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이 서역에서 처한 상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당나라가 서역과 한반도 양측에서 윈윈을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보였다. 약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려였다. 지금은 결판이 난 사실이지만 당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군의 만주진입 ...
70여 년 이어진 삼국통일전쟁기 백성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 - 2014. 06. 18.
 나당전쟁은 단숨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 온기와 냉기가 조금씩 밀고 당기다가 어느새 추위가 엄습하는 것처럼 일어났다. 670년 초 신라 고위 상층부에서 대당전쟁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이 세계 초유의 강대국이기도 했지만 신라의 전쟁 여력이 그만큼 고갈돼 있었다. 당시 신라는 물속에서 간신히 머리만 물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익사는 간신히 모면하고 있었...
唐 군사력 서역에 묶인 사이, 신라 나당전쟁 결심 - 2014. 06. 11.
669년 4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장악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는 가운데 평양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섰다. 그 원인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갔고 평양에 있던 설인귀가 안동도호부를 서북쪽인 신성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인귀는 669년에서 67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신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직속 군대를 데리고 장안으로 갔다. 일련의 소식들은 신라의 지원을 받고자 열망...
백제·고구려 멸망시킨 唐고산지대 전투에 ‘벌벌벌’ - 2014. 06. 04.
중국 군대 전투 반경 한정적 되도록 낮은 지역서 작전수행고산에 적응한 토번군 위력 병력자원 부족한 唐 누를 듯 668년 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들은 추운 겨울을 보냈다. 한파 속에서 당이 세운 신정부에 참여할 고구려인들을 모집하는 방이 붙자 조국의 멸망을 실감하기 시작했으리라. 그해 12월 당은 평양성에 총독부와 같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고구려 영토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설치해 군정지...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내분50만 당군에 백기 든 고구려 - 2014. 05. 28.
당, 신라군과 돌궐·거란·말갈 기병 이끌고한 달 넘게 평양성 포위 고립작전허수아비 보장왕 겁에 질려 투항 결정고구려군 성문 열고도 끝까지 저항신라군, 만신창이가 된 평양성 최종 접수 668년 9월 평양, 그곳에 동아시아 대부분의 인종들이 집합해 있었다. 성 안에는 고구려인들이 있었고, 중국인·신라인 보병과 돌궐 기병, 거란·말갈·해 기병이 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이 이끌고 온 병력 규모는 사상 초유였다. ‘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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