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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완결 금주의전투사

금주의전투사

제목만 보기 | 제목+내용
<50>동두천 부근 전투 - 2009. 12. 28.
 1950년 12월 초순에 평양으로 집결한 국군 및 유엔군은 대동강 선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청천강 방어진을 돌파한 중공군은 서부의 전 전선을 통해 신속히 공격하는 한편, 그 일부는 중부의 산악지대로 우회해 유엔군의 전선이 급박해졌다.  유엔군은 전략상 계획을 바꾸어 38도선에서 방어선을 전개할 목적으로, 12월 중순부터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서부의 모든 부대를 축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시...
<49>홍천부근 전투 - 2009. 12. 21.
1950년 12월 중순, 양양~인제~화천 지구의 중동부 전선은 장진호에 침입한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3·4·5군단이 남하해 점령하려 했으나 함흥~흥남 지구의 미 제10군단 철수작전(12월 24일 완료)에 투입됨으로써 북한군 제2군단이 이 지역 점령 임무를 담당하게 됐다. 이에 대해 12월 20일부로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예하 제7사단을 춘천 부근에서 현행 임무수행토록 하고, 제3사단은 인제 남쪽 38도선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부 전선에 투입, 적...
<48>흥남(興南) 철수작전 - 2009. 12. 14.
 흥남(興南) 철수작전은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중공군 9병단 예하 3개 군단(20·26·27군단)과 북한군 제4·5군단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성공적인 철수를 실시한 작전이다. 중공군은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을 포위 섬멸시킴으로써 유엔군의 우익을 제거해 전쟁에 유리한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흥남철수작전 결과 오히려 중공군의 대병력이 이 지역에서 견제 및 흡수돼 중공군 9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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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해병대 원산·함흥 전투 - 2009. 12. 07.
흥남에서 철수 대기 중인 국군 1군단 장병들. 1950년 11월 21일, 미 10군단(알몬드 소장) 예하 미 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했고,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까지 전진해 압록강을 목표로 진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2일부터 미 해병 1사단이 철수를 시작했고, 동부전선의 한국군 및 유엔군도 함흥과 원산 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신현준 준장)는 미 10...
<46>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 2009. 11. 30.
  6·25전쟁을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회담을 시작한(1951. 7. 10) 유엔과 공산 측은 1951년 11월 27일, 휴전조약이 30일 이내에 조인될 경우에 1951년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양측 참모장교들이 작성한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양측은 30일간의 유예기간을 가진 휴전(休戰)에 합의한 셈이다.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한다는 원칙하에 양측이 임시 군사분계선에 합의할 기미를 보이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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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고랑포 제1땅굴 발견과 교훈 - 2009. 11. 23.
임진강 고랑포 제1땅굴. 어떤 사건도 그것을 후일에 반추해 볼 때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의 긴장감을 그대로 느끼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한민국 군과 국민들에게 당시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북한의 위협을 경시할 수 없게 만든 일은 1974년 11월 15일에 처음으로 임진강 고랑포 지역 비무장지대(DMZ) 남단에서 북한이 구축한 땅굴이 발견된 사건이다. 그것은 북한의 대남전략의 집요함과 교활성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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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박천·태천·용산동 부근 전투(1950. 11. 6∼11. 30.) - 2009. 11. 09.
북진시 북한지역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국군장병들.중공군의 직접 개입은 6·25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개념 아래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 국가 건설을 위한 소련의 원조를 확보하려 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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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비호산(飛虎山) 전투 - 2009. 11. 02.
장애물을 통과하는 중공군.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으나 총알받이에 불과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만(韓滿) 국경선을 목표로 진격하던 1950년 10월 말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이 순조롭게 진격했으며, 서부전선에서는 미 8군의 지휘하에 국군 2군단이 우익부대로 초산~만포진 방면으로 진격하고, 미 1군단은 좌익부대로 신의주~벽동 방면으로 공격했다. 한편 이 시기에 북한군은 이미 붕괴돼 흩어졌으나 예기치 못한...
<42>운산전투:중공군 개입과 새로운 전쟁 - 2009. 10. 26.
1950년 10월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자료 사진>10월 13일, 모택동은 6ㆍ25전쟁 참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중공 정규군을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파견했다. 10월 16일의 선발대에 이어 19일 본대가 압록강을 도하해 한반도 북부의 산악 속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13병단(兵團, 야전군 규모) 예하의 4개 군(군단 규모)이 투입돼 물밀 듯이 진격하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41>초산 - 온정리 지역 전투 - 2009. 10. 19.
인천상륙작전(1950. 9. 15)의 성공과 더불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한 한국군 1군단은 1950년 10월 1일 동해안 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고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뤘다. 서해안의 미 8군도 10월 8일 38선을 돌파해 19일에는 미 1군단 예하에 속해 있던 한국군 1사단(백선엽 준장)과 뒤를 이어 미 1기병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미 8군과 한국군 1군단 사이 중부지역으로 투입된 한국군 2군단(유재흥 소장)도 6·8사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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