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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다시쓰는6·25전쟁

제목만 보기 | 제목+내용
<77·끝>전쟁이 남긴 것 - 2011. 12. 26.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 휴전회담 수석대표 윌리엄 헤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 측 대표인 북한군 남일(南日) 대장이 판문점 회의장에 입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의 만남에는 악수도 없었고, 목례도 없었다. 양측 대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정전협정과 그외 부속 문서 등 총 18통의 문서에 서명을 계속했다. 서명에 걸린 시간은 단 ‘11분’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
<76>소총으로 본 전쟁 - 2011. 12. 19.
 6·25전쟁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면 소총수들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산과 계곡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이 그만큼 보병들이 활약할 만한 공간을 많이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보병 소총수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것은 다름아닌 소총이었다. ◆ 든든했던 아군의 M1 소총  6·25전쟁 당시 우리 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소총은 M1 개런드(Garand)다. M1이라면...
<75>도서 확보전 - 2011. 12. 12.
6·25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상륙함이었던 LST 801 천안함 모형. 1세대 천안함이었던 이 군함은 해병대 42중대의 여도 상륙전과 해병대 41중대의 백령도 확보전을 지원하는 등 맹활약했다. 자료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1950년 12월, 그 혹독했던 겨울에 미 해군 제95기동부대(Task Force 95) 사령관 알랜 스미스(Allan E. Smith) 해군 소장은 야심 있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의 구상은 다름아닌 북한 해안의 전략적 가치가 높은 ...
6·25전쟁 첫해인 1950년 낙동강전선 일대에 미 공군의 폭격 흔적이 가득하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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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항공전력의 득과 실 - 2011. 12. 05.
6ㆍ25전쟁 발발 첫해인 1950년 미군은 북한군 포로를 대상으로 사기 저하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총 825건 중 176건의 포로 심문 보고서가 사기 저하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다름 아닌 ‘식량 부족’이었다. 그 다음 요인으로 지목된 것은 148건을 차지한 ‘전술항공기의 공격’이었다.6·25전쟁 첫해인 1950년 낙동강전선 일대에 미 공군의 폭격 흔적이 가득하다. 자료사진◆항공전력의 위력  당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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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미그 앨리'의 격전 - 2011. 11. 28.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의 첫 공세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항공전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11월 1일 오후 1시 35분. 평안북도 압록강 부근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미 공군의 F-51 무스탕 전투기 4대와 T-6 모스키토 전선통제기 1대는 생전 처음 보는 적 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점처럼 작던 적기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군 조종사들은 경악했다. 적기는 북한 공군의 Yak-9기 같은 프로펠러가 달린 구식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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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950년의 항공전 - 2011. 11. 21.
개전 초반 북한의 항공기 보유 대수는 미군 추정으로는 150대, 구소련 자료에 따르면 239대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아시아지역 일대에 배치된 미 극동공군(FEAF : Far East Air Force) 예하 3개 항공군들이 보유한 전투기와 폭격기, 수송기는 모두 1172대나 됐다. 일본 본토의 5공군을 중심으로 오키나와와 괌의 20공군, 필리핀에 주둔하는 13공군 등 총 3개 항공군으로 구성된 극동공군의 전력은 북한 공군보다 최소 5배 이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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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기뢰전의 악몽 - 2011. 11. 14.
1952년 9월 16일 밤 9시 15분 북한 원산 동쪽 166㎞ 해상에서 커다란 섬광과 함께 바다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렸다. 기뢰의 폭발 에너지는 미 해군 77기동부대 소속 구축함 바톤함(USS DD-722 Barton)의 선체를 강타했다. 그리고는 만재 배수량 3200톤, 전체 길이 114m인 알렌 엠 섬너급 구축함이었던 바톤함의 선수 용골부터 주갑판(Main Deck)까지를 찢어버렸다.1950년 10월 원산 소해전 당시 소련제 기뢰가 아군 소해정에 접촉...
미군이 6·25전쟁 당시 부산항에 M4 전차를 하역하고 있다.#
<70>군수와 보급 - 2011. 11. 07.
 “무릇 10만의 군사를 동원하면 백성의 부담과 국가 재정으로 하루에 천금이나 소모해야 하며, 온 나라 안팎이 소란해진다.” 중국의 위대한 군사사상가인 손자(孫子)의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0년도 훨씬 전에 손자가 간파한 것처럼 전쟁을 좌우하는 또 다른 핵심은 바로 돈과 군수 문제다. 미군이 6·25전쟁 당시 부산항에 M4 전차를 하역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6·25전쟁 당시 파괴된 북한군 전차. 아직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 파괴 원인에 대한 통계가 엇갈릴 정도로 연구는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69>전차전 - 2011. 10. 31.
6·25전쟁 전투사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간 흐름순으로만 살펴봐서는 부족할지 모른다. 6·25전쟁을 세부 분야별로 살펴봐야 한다면 가장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분야는 전차전 혹은 기갑전일 것이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침’은 지금도 6·25전쟁의 대표적인 상징코드이기 때문이다.6·25전쟁 당시 파괴된 북한군 전차. 아직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 파괴 원인에 대한 통계가 엇갈릴 정도로 연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들이 소독을 받고 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13일 반공포로 석방에 불만을 품고 철원~화천 일대에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자료사진 #
<68>금성전투 - 2011. 10. 24.
1953년 7월 13일 전선에서는 돌발적인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인 철원과 화천 사이 중부전선에서 이날 밤부터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것. 한국과 미국 외교 당국이 7월 12일 휴전 후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에 최종 합의한 지 단 하루 만의 일이었다. 당시 아군은 중공군의 대공세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으나, 막상 시작된 적의 공세 강도는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격렬했다. 유엔군 지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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