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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기획/연재 > 완결 국난극복사

국난극복사

제목만 보기 | 제목+내용
김홍일과 그의 저서 ‘국방개론’.
“국가기능 발휘 원동력이야말로 국방력이다” - 2013. 05. 14.
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래에서 추진한 국군의 건설 노력은 광복군의 창설로 결실을 보았다. 광복 이후 광복군의 정신과 경험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고스란히 건군의 자산이 돼 국방건설의 토대가 됐다.1949년 8월 병역법 시행…육·해·공군 3군체제 갖춰국난 대한민국 국군과 건군 정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미 군정기에 창설된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개편됐다. 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1948년 8월 15일). 
필자 제공
남북 분단 책임은 유엔 결정 거부한 북한에 - 2013. 05. 07.
8·15광복 이후 기대했던 독립국가가 세워지지 못했다. 남한과 북한에는 각기 소련과 미군의 군정이 들어섰다. 북측에는 김일성 중심의 집권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남측에는 다양한 정치 열기로 정치 일정이 지연됐다. 결국,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상정됐고, 유엔은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 총선거를 결정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총선거 외면한 북한지역은 이미 공산화 수립 남한지역만 1948년 5월 10일 반쪽...
한반도에 진출한 미군. 필자 제공
미·영·소 3국 모스크바 회담서 신탁통치 결정 - 2013. 04. 30.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한반도는 해방의 기쁨과 독립국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미·소 군정이 기다리고 있었다.北 소련 지원으로 김일성 실권 장악 적극 뒷받침南 미군정은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간접통치소련군의 북한 진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점령군은 함경도 지역을 거쳐 23일에는 황해 지역의 38도선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다. 각 도청 소재지를 우선 점령한 소련군은 8월 29...
미주리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대표. 
위키백과 제공
일본 항복 후 美-蘇 분계선으로 38도선 확정 - 2013. 04. 23.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합국의 승리가 임박하면서 연합국 간에 약소국의 독립이 논의됐기 때문이다. 대표들이 카이로와 얄타·포츠담에서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은 요원했다.소련군 대일戰 참전 파죽지세로 한반도 진입 美, 소련군 남하 저지 위해 38선 절충안 제시 카이로 회담, ‘한국 독립’이 논의되다 1942년 5월 말 일본 해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
김구와 이승만의 군사사상 - 2013. 04. 1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임정의 주석이자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구. 김구와 이승만의 군사적 인식과 태도는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金 국가 간 대등한 독립관계 강조 李 ‘한인부대’ 창설 대일전쟁 계획김구의 항일 독립운동 김구는 ‘문화국가’를 국가모델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그의 항일투쟁은 무장투쟁노선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임정의 경무국장을 맡...
광복군 훈련 장면. 
독립기념관 제공
대한민국 독립의 주체적 역량 보여줘 - 2013. 04. 10.
광복군총사령부의 성립으로 광복군이 창설되고 곧이어 부대 편성이 시작됐다. 임시정부가 군대 창설을 계획한 지 27년 만의 성과로 장차 대한민국 국군의 원형이었다.中·英·美軍과 연합작전 수행 광복 후 국군 창설 밑거름 돼광복군의 편성 광복군의 지휘체계는 중국군의 직제와 유사했다. 총사령부는 군단 규모를 상정한 부대 편성이었다.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그밖에 10개 처 중에서 7개 처의 책임자가 임명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
혁명군으로… 건국군으로… 독립 항전 ‘비전’을 쏘았다 - 2013. 04. 10.
대한제국의 국군 계승한 정통국군항일투쟁 주역 민족군대로 맥 이어광복군은 해외에서 활동한 무장독립운동의 통합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민족 구성원에 의한 주체적 역량으로서 ‘민족해방’과 ‘조국광복’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혁명군’으로서 항일투쟁은 물론 ‘건국군’으로서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건국군’으로서의 광복군 광복군은 총사령부성립보고서에 의하면, “일찍이 1907년 8...
의병참모 중장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포살 - 2013. 03. 26.
의병전쟁의 막바지에서 머지않아 조선이 강제 병탄될 위기에서 세계를 격동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1909년 10월 26일 이국땅 하얼빈의 역사에서 장쾌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포살이었다. 안중근,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백범일지’에서 김구가 자신보다 서너 살 아래인 안중근이 ‘영기 발랄하게 동방총을 질끈 동여매고 사격술’을 익히던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록할 정도로 안중근의 사격실력은 돋보였다...
1920년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이 미 캘리포니아 주 윌로우스에 설립한 한인 비행학교 모습. 
국방DB
독립군 차원 넘어서1940년 광복군 창설 건국군으로 ‘진군가’ - 2013. 03. 19.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해와 노령의 정부를 개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3·1운동 직후 노령의 대한민국 의회 정부와 상해의 임시정부, 그리고 한성 임시정부 등 6개의 임정이 통합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임정에 군사조직은 없었지만 군사제도에 대한 법제화가 추진되고 있었다.미국·영국·중국과 연합작전 ‘국권 회복’ 민족적 의지 표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
의열단원이 된 직후의 윤봉길.
살신 의열투쟁 중국 정부도 감동 군사·재정적 지원 - 2013. 03. 12.
이국 땅 상하이에서 자주 독립국 대한민국을 꿈꾸며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범한 망명정부였다. 임정은 정규군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무력 수단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열투쟁은 독립전쟁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항일투쟁 수단이었다.  의열투쟁, 또 하나의 독립투쟁방략 의열투쟁은 소수의 희생을 대가로 수행된 항일투쟁의 한 형태다. 임정에서는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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